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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와 프시케

키즈
유예여령

여령은 신의 신부가 된다는 조건으로 거두어졌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순응한 채 살아왔다. 그러니 때가 되었을 뿐이다. 장례식 행렬 같은 혼례 행렬의 종착지는 높고 가파른 산의 암벽 위. 순백색 천으로 치장한 여령을 꽃가마 채로 남겨두고 사람들은 미련 없이 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두려워하는 대신 체념했다. 그게 훨씬 간단했으므로.

한참 마음을 가다듬은 여령이 가마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본다. 날이 저물고 있었으나 저를 신부로 맞이한다던 신 따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신의 신부는 무슨. 사람 하나 들짐승한테 밥으로 던져주고 마을로는 내려오지 말라 하는 거겠지. 여령은 권태로움을 달래고자 신코로 흙바닥을 툭툭 파내며 제법 초연히 죽음을 기다렸다. 그 앞에 나타난 여우의 불인지 도깨비의 불인지 모를 것이 아주 조금만 더 늦었다면 오늘을 위해 갓 지은 새 신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헌 신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신나기라도 한 건지 통통 튀며 제 주위를 빙빙 도는 작고 푸른 불덩이가 꼭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 여령은 발걸음을 옮겼다. 불덩이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 나아가니 놀랍게도 산꼭대기에 있으리라 생각한 적 없는 궁궐 같은 저택이 여령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말 그대로 ‘나타났다’. 작은 개울이 궐을 보호하듯 둘러 흐르고 부근에는 발 디딜 틈도 없도록 색색의 꽃이 온통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짙고 달큰한 꽃향내가 코를 찔러와 마구 찔러와 본래라면 머리가 어질할 만도 하건만 오히려 편안해지는 것이 그곳에 신비로움을 더한다.

심지어는 여령이 놀란 토끼 눈으로 펼쳐진 광경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어서 와요, 여령. 당신을 기다렸어요.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귀에 들려오자 여령이 또 한 번 놀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곧 저 멀리서 인영 하나가 다가왔다. 저벅저벅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거구의 사내.

이 사내가 내게 말한 건가? 그렇다면 나를 신부로 맞이한다던 신이 이 남자인가? 여령이 빤히 쳐다보며 그리 생각하던 중, 사내의 입은 벙긋조차 하지 않았는데 아까 전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그의 이름은 유예. 당신을 곁에서 보필할 거예요.

 

 

꾸벅. 유예라고 소개한, 아니, 소개받은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접하기 힘든 덥수룩하고 짧은 길이에 더 접하기 어려운 백발. 크고 두꺼운 데다 상처투성이인 몸은 분명 장수將帥의 것인데 반면 살갗은 창백하니 날마다 서책만 넘기는 선비의 것처럼 창백했다. 눈썹은 굵직하고 눈이 날카로워 그러지 않아도 차가운 인상인데 거기에 표정도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고…… 조금 무서웠다.

이런 여령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유예라는 사내를 소개한 음성은 덧붙였다.

 

 

말수는 적지만 다정한 아이니까 안심해요.

 

 

글쎄. 나름대로 유예를 위한 변호인 모양이지만, 그는 저를 칭찬하는 말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기에 되려 처음 느낀 인상에 대해 더한 확신만 준다.

여령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 당신이 한 말에 전혀 공감할 수 없다고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있었다.

 

 

자, 앞으로 당신이 지낼 곳이니 한번 둘러볼래요?

 

 

 

온화한 목소리와 무뚝뚝한 사내─유예─는 궐 같은 저택 이곳저곳을 여령에게 구경시켜주었다. 우습게도 안내는 사내가 소개는 목소리가 하는 식으로. 이 사내, 말수가 적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없지 않나? 여령은 그가 음성과 육체가 분리되는 저주에 걸려 지금 같은 상황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잠깐 했다. 유예의 근엄한 분위기와 목소리의 당차고 대범한 어투는 조화가 전혀 맞지 않아 추측은 금세 접었지만.

 

어느새 산중에 땅거미가 졌다. 워낙 넓은 탓에 미처 다 돌아보지 못하였으나 목소리가 권유하는 대로 여령은 저녁 식사 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준비된 식사도 무척 따뜻하고 맛있었다.

 

유예가 요리를 잘하거든요.

 

한술 떠 입에 넣을 때마다 감탄하자 어쩐지 그의 시선이 어색하게 겉돈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유예가 만든 것이었던 모양이다. 의외였다.

식사 후 여령은 곤혹을 한번 치렀는데, 안내받은 욕탕에 몸을 담그려니 사내가 따라 들어와 시중을 들고자 해서 필사적으로 쫓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듯 사욕이나 음심은 일절 보이지 않아 더 황당했다. 아니 따라온 제 몸종도 아니고 ─물론 여령에게 거느리던 몸종은 없었지만─ 왜 당신이, 그것도 사내가? 극구 사양하니 결국 인자한 목소리가 유예를 만류하여 주기는 했다.

 

여령,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느라 고생했어요.

 

입욕을 마치고 나온 여령을 침방으로 안내한 후 유예는 가볍게 몸을 숙인 다음 자리에서 벗어났다. 목소리 역시 이만 쉬라는 말과 함께 더는 들리지 않았다.

 

여령이 홀로 남겨진 침실은 무척 넓어서 산책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 몇 개로는 온전히 방을 밝힐 수도 없어 군데군데 어둑했지만 두려운 느낌은 들지 않아 묘하기도 했다. 촛대 하나를 든 여령이 느릿한 걸음으로 방을 둘러보다가 종내 향한 곳은 방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차지하는 침대 앞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 크기는 홀로 쓸 것이 아니어서 여령은 새삼 잊고 있던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 착잡해졌다. 마음을 갈무리하며 협탁에 촛대를 내려두고 여령은 침대 위로 올랐다. 그런데 예상보다 침대가 훨씬 푹신해서 여령은 그만 중심을 잡지 못해 엎어지고 말았다.

목소리의 말대로 정신없는 하루였다.

엎어진 김에 그냥 쉬기로 한 여령은 꼼지락 자세를 편하게 바꿔 눕는다. 피곤함에도 쉬이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작은 창 너머 구름이 흐르는 걸 보고 있으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어쩌면 홀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기다림이 길어지니 긴장도 풀어진 모양이다. 켜둔 초가 닳아 꺼지고, 여령의 눈꺼풀도 무겁게 내려온다.

 

그렇게 깜빡 잠이 들려던 무렵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캄캄한 방에 불쑥 나타난 기척에 여령이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것을 눈치채고 그는 침대 근처까지 와서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배려인지 예의인지 그도 아니면 여유인지 모를 행동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여령은 긴장을 한결 덜어낼 수 있었다. 잠시였지만.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으나 지금 이 거리감으론 그 얼굴이 보이지 않고 몸집이 몹시 크다는 것만 전해져왔다. 미지未知는 두려움을 불러오기에 손쉬운 방법이라. 잠깐 침묵이 이어진다. 계속 길어지자 여령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제 남편…이 될 신이라는, 선하…인가요?”

“…….”

“저기….”

“… 그렇습니다.”

 

 

대답은 굼뜨게 흘러나왔다. 그렇다 아니다로 되는 말을 고민이라도 한 것처럼. 다만 묵직하게 떨어지는 단단하고 낮은 사내의 목소리가 현실을 잡아채 여령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오고야 말았다. 지아비 될 자가.

원한 적 없고 팔려 가듯 버려지듯 떠밀린 새신부라도 신부는 신부. 혼례식을 올린다고 끝이 아니라 ─사실 혼례식이랄 것도 딱히 없었지만─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게 진정 부부로 거듭나는 과정이자 새신랑 새신부의, … 의무였다.

여령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남편 될 사내, 선하는 반대로 허리를 낮춰 저지했다. 그가 달이 비치고 있는 작은 창을 등졌기에 짙은 음영의 그림자가 여령의 위로 드리운다. 점차 가까워지는 커다란 몸체가 여러 가지로 버거워 여령이 현실을 외면하듯 눈을 질끈 감아버렸는데, 몸을 눌러오는 무게감에 놀라 다시 동그랗게 뜨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무십시오. 밤이 깊습니다.”

 

 

여령의 위로 내린 건 사내의 건장하고 무거운 몸이 아니라 도톰하지만 보드랍고 가벼운 침구였다.

턱 아래까지 올라온 이불 천이 포근하다. 다소 엉뚱한 이 상황을 이해하려 여령이 선하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불쑥, 커다란 손이 먼저 다가와 그의 눈가를 덮었다. 빛을 막아주는 건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차단된 시야 하나만큼 예민해진 다른 감각들로 여령은 대신 선하를 찬찬히 느껴보았다.

 

호흡도 심박도 고요하여 얼핏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얼굴에 닿은 손바닥 살갗은 두껍고 조금 거칠었으며, 차가웠다.

그리고 이른 겨울 새벽 공기와 같은 향기가 났다.

그건 마치 고즈넉한 겨울 숲 한가운데를 홀로 거닐고 있는듯한 여유를 주어서 여령은 독백처럼 물었고, 선하는 그저 숲을 스치는 바람처럼 자약하게 대꾸했다.

 

 

“…… 자라고요?”

“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선하의 말마따나 여령은 몹시 피곤했던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었던 여령이, 창으로 들어오는 오전 햇살에 눈을 떴다. 일어나보니 침실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해가 이른 아침이라기에는 높았으므로 선하는 진작 방을 나선 듯했다.

 

초야初夜는 정말 여령의 숙면으로 끝이 났다.

 

잘 잤나요?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어 내리며 방을 나서자 어제의 그 감미로운 목소리가 물어왔고, 유예 또한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여령을 안내한다. 묵묵히 이동하는 유예에게 여령은 어디로 가는 거냐 조심스레 물었으나 대답은 목소리가 해주었다. 날이 좋아 정자에 식사를 차렸다고. 아침이라기에도 점심이라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정원에서의 식사는 여령을 기분 좋게 해주었다.

식사 후엔 어제 미처 다 돌아보지 못한 저택 내부를 구경하며 남은 하루를 보냈다. 듣기 좋은 목소리는 말주변까지도 좋아 계속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가며 여령의 긴장을 풀어주었고, 둘의 대화를 묵묵히 듣기만 하던 유예 또한 여령이 단을 못 보고 발을 딛거나 무성하게 자란 정원 수풀에 옷이 걸렸을 때 무심한 듯 섬세하게 챙겨주어 겉보기와 달리 자상한 이라는 걸 은연중 알려주었다.

물론 섣부른 판단이야 금물이지만, 이처럼 예의 바른 수족─목소리와 유예─을 두고 있는 데다 초야─아무 일도 없었던─에서 보여준 태도를 떠올리며, 여령은 제 남편, 그러니까 선하를 향한 경계를 약간 허물었다. 그들이 의도한 바가 이것이었을까?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에 여령은 또다시 다가오는 밤을 걱정할 틈이 없다.

 

하나 밤은 언제나 찾아오는 법.

여령이 욕탕에 몸을 담그는 동안 아마 유예가 침실의 불을 미리 밝혀두는 듯했다. 입욕을 마치고 돌아오니 초는 이미 반쯤 녹아있었다. 널따란 방은 어두우면 스산하기도 했고, 남은 초를 보니 일부러 끄지 않아도 잠들 때쯤 알아서 빛이 꺼질 것이라 여령은 바로 침대에 누웠다. 종일 걸은데다 어제보다 긴장이 덜했고 따끈한 물로 몸이 노곤해진 터라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다. 그러나 내심 찾아올 지아비를 기다려야 한다는 불안이 들어 여령이 수면욕과 처절한 싸움을 하는데,

 

훅,

바람 한 점 없이 초가 꺼지고 암흑이 드리운다.

 

 

“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 맞이하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선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내 침대 끝이 들썩이는 게 그가 걸터앉은 모양이었다. 여령은 같은 침대 위에서 피하지도 다가가지도 못한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보려고 했다.

어제와 같이 커다란 손이 여령의 눈가를 덮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여령의 몸에 움찔 힘이 들어갔으나 얼굴에 닿은 손바닥이 여전히 시원했고 그 손길이 또 다정하여 곧 몸을 편히 늘어트린다.

여령은 눈치가 빠르고 영리했다. 그게 신의 신부로 발탁되는데 한몫 톡톡히 하였으니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선하가 자신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 이유를 묻는 건 제게 허락된 일일까? 여령은 잠시 고민했으나 아직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곤 질문 대신 눈을 꾹 감는다. 여령의 속눈썹이 선하의 손바닥을 간지럽게 긁으며 눈꺼풀이 닫혔다. 선하 또한 여령의 뜻─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을 읽어내곤 손을 거두었다.

 

 

“좋은 하루 보내셨습니까.”

“더, 덕분…에요.”

“다행입니다.”

“아. 저기, … 선하.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여령 님께서 편하신 대로 불러주십시오.”

 

 

부부 사이에서 듣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한 호칭, 하물며 저쪽은 그저 높은 신분 정도가 아니라 신神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령이 경악하여 말을 더듬었다.

 

 

“네? 아니, 저, 님…을 붙이시는 건 조금…….”

“혹 불편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말을 꺼냈음에도 막상 칭하려니 서먹한지, 선하는 무던히 머뭇거린 후에야 문장을 이었다.

 

 

“…… 부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또한 낯간지럽긴 마찬가지였으나 높임보다는 부담이 덜했다. 솔직히 굵직하나 잔잔하게 울리는 저음이 다소 어색한 투로 저를 부인이라 부르는 것은 듣기에 나쁘지 않았고. 아니, 어쩌면 좋을지도. … 얼굴도 모르는 남편에게 이렇게 점점 호의를 가져도 되는 걸까? 문득 걱정이 앞선다. 더 나아갈 길 없는 곳에서 만난 상대에겐 이용당하기 쉬움을 여령은 잘 알았다.

 

 

“부인,”

 

“지금도 앞으로도 저는 부인이 걱정하고 있는 일을 강요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하는 여령의 이런 고민을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보곤 선수를 썼다.

선하의 말에 여령이 무심코 눈을 뜰뻔하자 다시 손이 눈가로 올라왔다. 어쩐지 아까보다 서늘한 느낌이었다. 미안해요. 암묵적인 약속을 깰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아차 싶어 여령이 급히 사과하자 괜찮습니다. 그리 대답하는 목소리는 손과 달리 따뜻했다.

선하는 덧붙였다.

 

 

“그저 이대로… 마땅히 당신이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며 지내시면 됩니다.”

“제가 누려야 할 것들…이요?”

“네. 그러기 위해 부인을 여기 모셔온 거니까요.”

 

 

그의 말을 곱씹어본다.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뭐지? … 과연 그런 게 존재했던가? …… 내가 감히 누리며 지내도 되나? 서글픈 생각이 이어지자 둘 사이 침묵도 길어졌고, 내려앉은 고요에 홀린 그가 그대로 잠드는 바람에 둘의 대화는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잠들기 전 여령이 어렴풋하게 느낀 감정은 두려울지언정 적어도 전과 같은 체념이 아니라는 것.

커다란 손이 희미하게 붉어진 여령의 눈가를 가볍게 문지르곤 곁을 떠났다.

 

 

 

 

 

마땅히 누려야 한다는 건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듯, 이곳에 온 뒤로 여령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내킬 때 자고 내킬 때 일어나며 배가 고플 때면 호화로운 식사와 간식이 나왔다. 화려한 색의 옷감으로 치장을 할 수도 있었고 원한다면 속곳만 입은 채 맨발로 풀을 밟아도 되었으며 ─다만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유예의 눈빛을 견뎌야 했다─ 음악이 듣고 싶으면 곧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또 여전히 모습을 보이진 않는 목소리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여전히 대답이 몸짓뿐인 시종에게 말을 걸기도 했으며, 서재에서 종일 책을 읽어도 되었고 종일 욕탕에서 첨벙거려도 되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제법 장난기가 많다는 걸 알게 된 목소리도,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던 ─위험하지만 않으면─ 묵묵히 따르는 시종도,

밤에만 찾아오는 남편 역시

여령을 존중하고 다정히 대해주었다.

 

언제나 동이 트기 전에, 날이 새기 전에, 자신이 깨어나기 전에 사라지는 여령의 지아비 선하. 그는 꽤 무뚝뚝한 성격인 듯했다.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늘 여령이 물으면 대답하는 것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하나 자신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느껴졌기에 여령은 신나서 그에게 조잘조잘 떠들다 졸리면 그대로 스르륵 잠드는,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다.

다만 그렇게 지금까지의 처량했던 신세를 보상받는 기분이 들면 여령은 오히려 덜컥 불안해졌다. 보상에는 항상 정량이 존재했으니까.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실망할 자신이 두려웠다. 어쩌면 선하는 이런 저의 음침한 부분을 진작 눈치채고 거리를 두기 위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여령은 세차게 고개를 저어 정신을 환기했다. 멋대로 판단하고 멋대로 실망하는 것만큼 잔인한 일이 없다는 걸, 손수 겪어 잘 알지 않나.

 

 

무슨 생각을 했길래 고개를 그렇게 저어요?

 

“그게… 저기, 당신은 선하를 어떻게 생각해요?”

 

 

여령이 조심스레 묻자 목소리는 곤란하다는 투로 웃으며 말한다.

 

 

이런, 저는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겠네요.

 

“해선 안 되는 질문이었다면 미안해요.”

 

그건 아니에요. 음… 아, 정 궁금하다면 유예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요?

 

“네? 유예 씨한테요……?”

 

저는 엿듣지 않을게요.

 

 

생각지도 못한 선택지에 여령이 빠르게 눈을 깜빡인다. 유예?

글쎄. 그의 말로는 말수가 적다더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여기서 생활하며 며칠이나 지났건만 여령은 아직도 유예의 목소리 한번을 듣지 못했다. 성대를 다쳤다거나 대화를 거북해하는 건 아닌듯한데. 이유가 있나…? 번뜩 스치는 유예를 향한 의문 덕분에 지금 이 생활과 선하에 관한 걱정은 얼마간 희석되었으나,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여령이 종종걸음으로 유예에게 다가간다. 욕탕 시중을 거절한 후로 항상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곁을 지키던 그였기에 이리 가까이 마주한 건 새삼 처음이었다.

 

 

“저기, 유예… 혹시 당신은 선하를 어떻게 생각해요?”

 

 

과연이라고나 할까 예상대로랄까, 유예는 대답 없이 멀뚱멀뚱 여령을 쳐다볼 뿐이다. 하나 여령은 함께 지내는 며칠 사이 유예와 대화를 이어가는 요령을 터득한 상태였다. 유예에게 질문할 때는 설명 대신 판정을 요청하면 몸짓으로 어느 정도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걸 그는 이제 안다. 질문을 바꾸었다.

 

 

“좋은 사람이에요?”

 

 

유예는 어째 고민하듯 눈동자를 사선으로 그었다. 곧 나릿나릿 고개를 끄덕여 긍정은 했으나 여령은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대답을 고민해야 하는 좋은 사람도 있나. 다행스럽게도 ─겨우 며칠 알고 하는 말이라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선하는 무뚝뚝해도 내내 여령에게 자상했고 유예도 거짓으로 상대를 감쌀 성정은 아니었으므로 큰 의심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유예 씨는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예사로이 중얼거린 여령이 다시 멈췄던 산보를 나서려는데,

엣취.

방금까지 온화하던 공기가 순간 서늘했다. 가벼운 재채기와 함께 여령이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을 슬슬 문지르자 유예는 냉큼 제 겉옷을 벗어 여령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이, 이럴 것까진 없는데. 그러나 사양하기에는 그 표정을 봤을 때 이미 저는 독감에 걸려 앓아눕기 직전인 사람이라서, … 풉! 당혹스러운 얼굴을 뒤로 하고 여령은 푸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있죠.”

“….”

“유예도 좋은 사람이에요.”

“…….”

“아,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유예의 옷이 워낙 큰 탓에 결국 걸친 건지 덮은 건지 모를 꼴이 되어 산보를 계속했다. 자꾸만 흘러내리려는 겉옷을 더욱 여미자, 은은하게 배어있는 옷 주인의 체향이 코끝을 스친다. … 유예는, 어쩐지 선하와 닮았다. 적어도 여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유예가 좋은 사람이란 확신이 들수록 선하 역시 그러리란 기대가 있었다.

밤이면 찾아와 제 눈가를 덮는 큼직한 손과 초겨울 동틀 무렵의 차가운 향을 떠올리며 여령이 희미하게 웃었다.

 

 

 

 

 

모쪼록 겉보기뿐일 신혼 생활이라도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서로가 편안해지는 것은 응당 자연스러운 순서로, 여령은 첫날과 달리 조금씩 제 의사를 선하에게 비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기꺼워 선하는 여령이 제게 무언가를 요청하면 ─사실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가 지금까진 없었지만─ 흔쾌히 들어주고자 했다.

 

 

“선하, 부탁이 하나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저… 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어요.”

 

 

그러나 이번엔 드물게 곤란한 부탁이었는지 선하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보통이었다면 그가 난처한 기색을 보일 때 한발 물러설 성정의 여령이다. 하나 이에 대해선 그러지 못할 만큼 간절한, 어쩌면 유일한 바람이었다.

여령이 아스라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애원했다.

 

 

“하나뿐인 친구인데, …… 인사도 못 하고 여기 와버렸거든요.”

“… 생각해보겠습니다.”

 

 

말은 그리했어도 여령이 처음으로 거듭 부탁한 일을 외면할 수 없었던 선하는, 그가 만나러 가는 대신 친구를 여기로 데려오는 것으로 청을 들어주었다.

 

도착한 모양이에요.

 

여령의 필체가 적힌 편지 겸 초대장을 유예로부터 건네받곤 보복이 두렵지도 않은지 덥석 그의 멱을 잡았다는 호쾌한 친구, 여수연. 마을의 모두가 신의 신부는 부정을 타면 안 된다, 정을 줘도 곧 떠날 이다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기피하던 여령에게 선뜻 다가온 유일무이한 사람. 여령에게 수연은 절친한 친우이자 자매이자 나아가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이산했던 수연과 상봉하자마자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수연아…!”

“여령! 야! 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숨이 막히게 서로를 와락 끌어안고, 수연이 까맣게 탄 속을 애써 장난스레 포장하여 가벼운 투로 질책하고, 여령 또한 만일하는 미안함 대신 의식적으로 반가움에 무게를 더해 찾아와준 친우를 맞이했다. 외견 없이 음성만 들려오면 친우가 놀랄까 잠자코 있는 ─정확히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나─ 목소리와 한결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곁을 지키고 있는 유예는 안중에도 없이 여령은 수연과 둘만의 세계를 구축해 실컷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물론 유예와 목소리─그리고 아마 선하도─는 저렇게 편히 누그러진 모습의 여령은 처음 보았기에 그 사실에 서운해할 수 없었다.

두 여인이 수다를 떤 지 얼마나 지났을까. 수연은 혹 여령이 곤란하지 않나 싶어 일부러 언급을 꺼렸던 부분을 슬슬 화두에 올렸다.

 

 

“있잖아, 그… 남편은? 잘해줘?”

“… 응! 나 정말 잘 지내. 걱정하지 마, 수연아.”

“……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내가 볼 때 너,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고스란한 거짓이 아니니 무난히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역시 오랜 친우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수연은 근심 어린 눈으로 여령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령은 소중한 수연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 화제를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느라 잠시 말을 멈춘 여령은 곧 모순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수연에게는 전부 솔직해지고 싶다는.

제게는 과묵한 유예이나 선하에게는 어떨지 몰라 듣는 귀가 없었으면 했다. 유예, 그리고 묵시적으로 목소리에게 잠시 둘이 얘기하고 싶으니 자리를 피해 달라 부탁하곤 신중히 말을 골라 수연에게 이야기했다.

아직까지 신이라는 지아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수연은 기함을 토했다. 그래도 남편이고 사람 대 사람으로 선하와 제법 정이 들었기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그 외 전부는 좋은 이라고 변호해도 수연은 회의적이었다. 당연했다. 그에게는 여령이 그의 남편보다 훨씬 중요했으므로.

 

 

“여령.”

“응.”

“너 스스로를 믿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유예가 도로 여령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뒤에서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왔기에 여령은 알지 못했으나 수연은 똑똑히 보았다.

저 무뚝뚝한 얼굴에 떠오른 순간의 초조와 죄책을.

수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곤 여령이 아닌 유예를 향해 들으라는 듯 나무란다.

 

 

“그러니까 너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들을 사랑해선 안 돼.”

“아…….”

“반드시 기억해. 사랑과 의심은 한곳에 있을 수 없어.”

 

대화 중에 미안해요. 시간이 늦은 것 같아서요.

 

 

수연이 여령에게 거듭 당부하는데, 내내 침묵하던 목소리가 암묵적으로 그에게 이만 돌아가라는 뜻을 전했다. 예상과 달리 육체 없이 허공에서 갑작스레 들려오는 음성에도 수연은 놀라지 않고 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재회가 길지 않아 여령은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수연의 또 올게, 못 오게 해도 온 산을 뒤져서 찾아올게, 결연하게 건네는 약속에 밝게 웃으며 그를 배웅할 수 있었다. 못 오게 하지 않아요, 목소리가 쓸쓸히 덧붙인 건 덤이었고.

 

 

“여령. 너 스스로를 믿어.”

 

“너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들을 사랑해선 안 돼.”

 

“사랑과 의심은 한곳에 있을 수 없어.”

 

 

수연이 떠나기 전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리에서 맴돌았다. 그 말은 여령의 많은 고민을 단번에 관통했기에.

여령은 의심하고 있었다.

제게 과분한 자리를 마땅히 당신의 것이라며 전부 내어주는 이들을, 그리고 과연 제 것이 맞나 노심초사하면서도 뻔뻔하게 영위하는 스스로를.

그럼에도 지금 이 생활과 함께하는 이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과 의심이 공존할 수 없다면 하나를 지우면 된다. 그는 의심을 걷어내기로 했다. 다소 이기적인 형태로라도.

 

밤이 깊었다.

 

도둑은 제 발 저리고 때린 자는 다리를 못 뻗고 잔다고 했다.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지만 여령은 잠은 오지 않았다. 게다가 불안한 듯 뒤척임이 잦다. 그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는 선하 역시 걱정스레 물어온다. 오늘 친구분과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여령이 천천히 고개를 저어 부정했으나 걱정은 가시지 않았나 보다. 눈가를 누르고 있는 서늘한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여령은 선하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감싸 쥐었다. 그 행동이 저지라고 판단한 선하가 다급히 힘을 풀며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아프셨습니까?

… 용서를 구해야 하는 쪽은 여령 자신인데도.

 

 

“선하.”

“네. 말씀하십시오.”

“미안해요.”

 

 

여령의 눈동자가 벌어진 선하의 손 틈새로 굴러갔다.

꾹 감고 있었기에 진작 암흑에 익숙해진 시야는 근접하고 있는 그의 인영을 어렵지 않게 잡아낸다. 머리카락과 피부가 어둠 속에서도 희게 빛나는 탓에 더 확인이 쉬웠는지도 모르겠다. 찰나 황망한 표정이 여령의 눈동자에 담기자 선하는 어떻게든 다시 여령에게서 제 모습을 감추려 했다.

아니, 선하가 아니었다…….

 

 

“…… 유예…?”

 

 

진실을 입에 담았음에도 명쾌하긴커녕 혼란만 몰아친다.

 

 

“부, … 여령 님.”

 

 

그는 체념하고 여령에게 얹은 손을 거두었다. 여령이 몸을 일으키곤 그와 마주 앉아 다시 찬찬히 상황을 훑어본다.

커다란 몸집. 어수선하게 뻗친 백색의 짧은 머리카락. 창백하게 희고 흉터가 여기저기 눈에 띄는 피부. 생긴 모양은 날카롭지만 뻗어나는 시선은 사실 자상한 눈과 어느 때에도 반듯하게 다물린 입. 그 무겁던 입술을 간신히 열고 뱉는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는……,

분명 선하의 것이었다.

 

 

“왜 저를 속였어요…?”

“….”

“아니… 어느 쪽이 진짜예요? 유예? … 아니면 선하?”

“… 저는 선하 님이 아닙니다. 신은 더욱 아니고요.”

 

 

솔직히 말해 여령은 질책할 의도가 아니었다. 혼란스러움이 한계에 다다라 제 어투가 어떤지 의식할 새도 없었던 것뿐이다. 선하도, 아니, 낮의 유예라면 분명 알아차렸을 테다. 하나 유예 또한 극도로 당혹스러웠고 그보다 훨씬 죄의식에 사로잡혀있었다.

 

 

“처음에는 선하 님의 부재를 수습하고자 자리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원체 자유로운 분이시지만 설마 여령 님을 모셔온 날 목소리만 남기고 모습을 감추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

“거짓이란 건 정말 눈덩이처럼 불어나더군요. 첫날, 둘째 날, … 그렇게 계속 여령 님과 보낸 날이 늘어갈수록…….”

“…….”

“신의 신부가 되셔야 할 당신에게 한낱 도깨비인 제가,”

 

“감히 불경한 마음을 품어버렸습니다.”

 

 

그리 말하는 어조가 너무도 담담해서, 이어지는 고백은 마치 고해告解 같았다.

여령은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걸 무슨 뜻으로 해석했기에. 죄송합니다. … 선하 님은 제가 책임지고 찾아서 모셔오겠습니다.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여령이 만류하기도 전에 유예는 침실을 박차듯 떠난다. 어찌나 날랜지 급히 뒤를 쫓으려 일어났을 때 긴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유예! 불러보지만 역시 대답 없이 제 음성만 메아리로…

 

제 잘못이에요.

 

… 돌아오지 않고 객을 데려왔다.

여령이 감기라도 들까 걱정한 유예 덕에 창은 꼭꼭 닫혀있는데 거센 바람이 침실을 휘저었다. 여령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려 시야를 막은 사이 캄캄한 방 안에 하나둘 빛이 들어왔다. 작고 동그랗게 뭉쳐 떠오른 빛방울들. 그건 반딧불 같기도 아니면 처음 여령을 이곳으로 인도해주었던 도깨비불 같기도 했다.

그리고 바람이 잦아듦과 동시에 흩뿌려진 빛 가운데 불쑥 나타난 사내. 유예만큼 듬직한 덩치에 아무리 봐도 이승의 것 아닌 화려한 복장이 하늘거린다. 은빛의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미소인지 비통인지 모를 표정의 가면 아래로 하관만이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신비로움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신의 외견이다. ‘목소리만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는 유예의 말까지 떠올라 여령은 금세 그 정체를 깨닫는다.

 

 

“당신이 진짜 선하였군요.”

“미안해요. 당신을 속인 게 되어버려서.”

“… 왜 제가 여기 온 날 모습을 감춘 건가요?”

 

 

선하 당신이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면, 초야에 유예가 대신 들어오는 일은 없었겠지. 그럼 여령은 눈가에 닿은 거친 살갗과 서늘한 체온을 모를 수 있었을 거다. 그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초겨울의 새벽 향기와 과묵하여 듣기 힘든 낮은 목소리가 사실은 다정하다는 걸 몰랐을 거다. 몰랐다면 이런 마음을 갖지 않았을 터였다.

그럼 유예와 이렇게 틀어질 일은 없었을 테지.

그럼, 유예와, 이렇게…….

 

표정으로 드러나는 여령의 원망에 선하는 난처하게 웃으며 해명한다.

 

 

“신부라는 구실은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제가 정말 당신을 아내로 맞기는 어려웠거든요. 저는 당신 어머니에게 빚이 있어요. 그런데 그 딸과 어떻게 혼인해요.”

“네? 엄마를… 아세요?”

“아주 잘 알고 있죠.”

 

 

어쩐지 미소 지은 입꼬리가 씁쓸하게 보이는 건 여령의 기분 탓이었을까? 하지만 눈을 깜빡이고 다시 본 선하에겐 아까와 같이 너그럽고 신비한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유하던 목소리와는 결이 다른 단단하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그녀에게 부탁받은 건 당신의 행복,”

“….”

“그리고 당신이 행복을 평생 나눌 수 있는 상대였어요.”

“…….”

“여령.”

 

 

이제 남은 선하의 물음은 단 하나였다.

 

 

“유예를 사랑하나요?”

 

 

여령은 그에 망설임 한 점 없이 대답했다.

 

 

“네.”

 

 

그리고 선하, 당신도요. 물론 유예랑은 좀 다르지만. 뒤이어 여령이 굳이 붙인 사족에 선하는 소년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선하가 손가락으로 지평선을 가리킨다. 그러자 앞으로 빛무리가 동동 떠올라 이어지며 가야 할 길을 만들어주었다. 길 끝에는 유예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령은 안다. 이건 단지 방향일 뿐이라는 걸. 도착할 곳은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걸.

가요, 여령.

선하의 종용을 신호로 삼아 여령은 달렸다.

 

 

“유예!”

“여령 님?”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산등성이에서 간신히 찾은 유예의 소맷부리를 냉큼 잡아낸 여령이 한계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인다. 아직 그를 전처럼 예사롭게 대할 자신이 없어 무슨 핑계든 자리를 피하고 싶은 유예였으나 그보다 여령이 컥컥 내뱉는 밭은 숨에 안절부절못하기가 우선이다. 물 맺힌 여령의 눈꼬리에 손을 올리려던 유예가 동작을 멈췄다. … 이제는 함부로 닿으면 안 되었다. 민망해진 손을 말아쥐고 아래로 떨군다. 시선 또한 자연히 아래로 떨어진다. 그제야 여령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설의 하나, 게다가 버선발로 새벽녘 숲을 헤맨듯했다.

왜 여기 계십니까.

하아… 당연히 당신을 찾으려고,

그 모든 게 고작 감정에 취해 제멋대로 뛰쳐나온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드니 유예는 화가 났다.

누구에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저를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네?”

“분명 선하 님은 제가 찾아서 여령 님께 모셔가겠다고 했습니다.”

“네? 잠깐만요, 유예…”

“우선 저와 돌아가시죠.”

“아! 선하가 아니라 유예 당신이라고요!”

 

 

유예의 눈이 커진다. 우선 여령이 이곳에 온 후로 소리 지르는 것을 그는 처음 들었다. 그리고… 선하를 찾아 뛰쳐나오기 전 여령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기억났기 때문에.

 

 

“유예? … 아니면 선하?”

 

 

“혼인 상대를 속인 거? 그래요, 괘씸해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거 때문에 제가 혼자 속앓이한 거 생각하면 적어도 한 대는 때려주고 싶어요! … 근데, 그건 제가 용서하면 되는 일이잖아요.”

“….”

“낮에도 아닌 척 무심하게 챙겨주고, 밤이면 찾아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피곤하지 않냐 물어보곤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손이 차갑고 가까이 가면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

“…….”

“제가 좋아하게 된 사람은… 유예 씨라고요.”

 

 

유예는 둔기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여령 님의 친구분께서 의심과 사랑은 함께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걸 기억하십니까. … 저는 여령 님께 의심밖에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충격 탓에 정신을 잃고 몽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고지식한 이 남자는 꿈에서조차 덧없는 욕심을 억누르고 회피한다. 그러나…….

 

 

“유예.”

“네.”

“당신을 사랑해요.”

 

 

신의 신부가 되기 위해 와선 도깨비의 신부로 지냈던 여령은 과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말, 의심할 건가요?”

“…… 그럴 리가요.”

 

 

그럼 의심은 없는 거네요. 여령이 말간 얼굴로 웃어 보인다.

달려오느라 긴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상기된 눈가가 촌스러울 정도로 붉었다. 입은 옷은 땀과 흙투성이에 버선발로 달려와 사랑을 고백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 유예는 물기 하나 없지만 축축한 얼굴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뜨거운 숨이 나지막한 바람과 함께 여령의 귓가에 닿았다.

 

 

“앞으로도 계속… 저의 부인으로 있어 주십시오.”

“바라던 말이에요.”

 

 

여령이 덩치만 커다란 아이를 달래듯 마주 안아 등을 쓸어준다. 그의 응석 같은 청혼과 맹세도 사랑스러웠다.

©Copyright Does God work overtime? DON'T RE-POST ARTS

BGM : Sereno, Benicx - 마지막 세계의 왈츠 (Orchestra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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