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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결혼식
톳
소하여령
“오늘 너무 예쁘세요, 주임님-!!”
“아, 해나 씨, 와줘서 고마워요.”
따뜻한 오월의 어느 날, 소하와 여령의 결혼식이 열렸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은 열리기 직전이지만. 하객을 받고 있던 여령은 직장 후배, 해나의 호들갑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늘 정말 날씨도 너무 좋고, 결혼하기 딱 좋은 날 같아요. 날 너무 잘 잡으셨-”
“주, 주임님!”
해나의 주절거림을 끊으며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회사의 일 문제로 처음 만나고, 천산 문제로도 만나고… 하여튼 이런저런 만남이 잦았던 재윤이었다.
“재윤 씨?”
재윤은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한참 동안 말도 못 하고 숨을 고르더니 겨우 말을 했다.
“이렇게 갑자기 죄송해요. 그런데, 그게…”
재윤이 머뭇거리더니 여령에게 귀를 가까이해달라는 손짓을 했다. 여령이 귀를 가까이 대자, 재윤이 속삭이길,
“소하 님이 사라지셨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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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이 근처에 있을 것 같은데,”
여령은 웨딩드레스의 자락을 부여잡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재윤의 말을 떠올렸다.
“무, 물론, 소하 님이 주임님을 두고 결혼식 당일에 도망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요. 그래도 자리를 좀 오래 비우신 것 같아 걱정되어서… 별일 없으시겠죠?”
별일 없긴 할 거다. 재윤의 말마따나 소하는 결혼식 당일에 신부를 버리고 도망갈 사람은 아니니까. 단지, 얘기를 전해주러 온 재윤과 그걸 같이 들은 해나가 둘 다 울먹거리며 신부인 여령보다도 불안해하기에 여령은 둘을 안심시키려고 소하를 찾으러 온 것이다.
“예쁘다…. 안에서 하객들 맞느라고 제대로 못 봤는데.”
여령이 소하를 찾으러 온 곳은 정원이었다. 둘의 결혼식이 열리는 장소는 전통 한옥의 고풍스러움과 현대의 세련됨을 갖춘 건물이었는데, 이 주변은 숲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제법 울창하게 자란 식물들이 많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령이 신랑을 찾으러 왔다는 목적도 잊고 주변 풍경에 감탄하고 있을 때, 낯익은 잿빛 머리카락이 여령의 눈에 들어왔다.
“소하 씨?”
여령이 성큼 다가가자 소하의 몸이 움찔 떨리더니 웬일로 여령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늘 자신을 올곧게 보며 말하던 사람이었는데.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가 여령의 귀에 감겼다.
“여긴 어쩐 일로 왔습니까?”
나무 근처의 벤치에 앉아있던 소하의 옆에 여령이 풀썩 앉고는 대수로운 일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야, 결혼식 당일에 신랑이 도망갔으니 찾으러 왔죠?”
그 말에 소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여령을 바라봤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턱시도와는 다르게 소하의 얼굴은 묘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화장 때문에 가려졌지만, 살짝 붉은기가 올라온 얼굴, 그보다 더 붉어져 있는 눈가, 평소보다 물기 어린 눈동자. 소하도 이를 알았기에 처음에 여령을 보지 않고 말한 거였겠지만, 저 말을 들은 이상 여령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자리 비운 건 미안해요. 금방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단지, 생각을 할 게 있어서-”
소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령이 소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좀 세게 쥐었던지, 소하의 눈은 둥그레지고, 소하의 입술이 오리 입술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이제야 절 보네요? 저도 정말로 소하 씨가 도망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하도 해나 씨랑 재윤 씨가 불안해해서 찾으러 온 거지. 그런데, 소하 씨, 울었어요? 눈가가 빨간데.”
소하는 여령의 손을 내칠 기운이 없기라도 한 건지 가만히 여령의 손에 얼굴을 맡긴 채 눈만 아래로 떨구고는 삐죽 나온 입술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세상에, 별일이야. 백만 와이튜버이자 설화계의 섭정인 김소하가 결혼식 당일에 신부도 안 울었는데, 울어버리다니. 하하하, 귀여워라.”
여령은 새삼 소하가 자신보다 어린 ‘소년’ 이야기꾼이라는 게 실감 나 웃음을 터뜨렸다. 여령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소하가 자기 얼굴을 감싼 여령의 손을 쥐고 내리더니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제 나이에 맞는 표정으로.
“당신 지금 제가 어리다고 생각했죠? 이제 저는 그때의 스물다섯이 아닌데도요.”
“들켰네요. 역시 소하 씨는 날 너무 잘 알아-. 그래서 왜 운 건데요? 혹시 심각한 일이었어요? 그런 거면 놀려서 미안해요.”
여령의 사과에 소하가 다급히 말을 가로챘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소하는 여령에게서 눈을 돌리고는 앞을 가만히 바라봤다. 여령과 소하가 앉은 벤치의 앞에는 아름다운 자연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언젠가 둘이 거닐었던 천산의 어느 숲이 떠오르는.
“…그냥 저랑 당신이 인간인 게 갑자기 불안해져서요.”
“네?”
“저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 당신을 치유할 힘도, 당신을 해하려는 자를 공격할 힘도, 그런 자를 재빠르게 찾아낼 힘도 없습니다. 그런 무능력한 제가… 당신의 배우자를 해도 되는 걸까요.”
“소하 씨.”
“그리고, 당신도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잖습니까. 설화에 얽매이지 않아서 언제든지… 저를 떠날 수 있는.”
여령은 고개를 푹 숙인 소하의 얼굴을 다시 감싸 쥐고는 자기 쪽으로 얼굴을 향하게 했다. 여령이 굳은 얼굴로 소하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자, 소하는 결혼식 날 괜한 말을 했다 싶어, 말을 돌리려고 했다.
“제 얼굴 그만 좀 잡으시죠. 화장 다 지워지겠습니다.”
“소하 씨.”
여령의 단호한 부름에 소하는 가만히 여령의 눈을 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듯 작게 숨을 내쉬고는 답했다.
“…네, 여령 씨.”
소하의 대답에 여령은 굳은 얼굴을 풀고 살짝 웃으면서 조심스럽게 소하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소하에게 고정한 상태였다.
“소하 씨 말대로 저희는 인간이죠. 설화계 존재들이 보기엔 감탄할 만한 능력도 없고, 정해진 운명도 없어 이리저리 방황하는. 그렇지만, 그래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잖아요? 천산에 물론 좋은 분들은 많았죠. 하지만, 의지할 수 있는 ‘인간’은 서로 밖에 없었어요, 당신도, 나도. 인간이어서 마주치는 상황들을 당신과 같이 겪을 때, 제가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는 줄 알아요? 저는 인간인 당신이 있어서 천산에 계속 남을 수 있었어요. 저에게 호의적이기도, 적대적이기도 한 수많은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저랑 같은 존재를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하의 엄지가 여령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자, 그제야 여령은 자기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하, 이게 뭐예요. 결혼식에 신랑 신부 둘 다 눈 퉁퉁 부은 채 입장하겠네….”
소하가 여령을 조심스럽게 안고는 다독이기 시작했다.
“괜히 같이 울게 해서 미안합니다.”
여령은 가만히 소하가 자기 등을 일정한 간격으로 토닥이는 소리를 들으며 안정되어갔다. 여령도 소하를 마주 끌어안았다. 둘의 심장 소리가 천천히 같은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엮인 설화는 없지만, 대신 서로를 자기 의지로 선택했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괜찮을 거예요. 다른 평범한 인간들처럼 가끔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겠지만, 다시 사랑하고 곁에 있는 선택을 할 거예요. 저희 의지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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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임님-!!”
“소하 님 찾으셨네요? 이제 바로 들어가셔야 해요!”
여령과 소하가 식이 열리는 곳으로 돌아가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해나와 재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걱정 끼쳐서 미안합니다. 얼른 들어가죠.”
소하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여령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여령은 씩 웃으면서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대로 둘은 식장으로 들어갔다. 눈가가 붉어진 평범한 신랑 신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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