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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너에서 오늘의 우리로
이나
소하이나
"왜에!"
외마디 비명이 방을 가득 메웠다.
책상 의자에 앉아 머리를 붙잡고 있는 이나다. 이 주 전, 이나는 소하랑 결혼식 전날 밤 각자 집에서 보내기로 약속했다. 소하는 그날만 잠시 떨어져 있는 거라고, 서로의 집이 워낙 멀기도 했고, 식 후에는 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한다며, 도착하면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부둥켜안기나 하라며 사소한 핑계를 대면서 내심 이나에게 못 미더운 안심을 시키며, 그렇게 오늘 둘은 각자의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
사실 소하는 몇 주 전부터 준비한 축가 연습에 한창이었다. 대체... 이런 걸 왜 하냐고 물으신다면, 지난 3월, 이나의 회사 동료 결혼식에 함께 참석한 적이 있었다. 평소 이나와 두터운 친분이 있는 동료라 그런지 그녀도 다소 긴장을 하는 듯 보였다. 둘은 가장자리에 착석해 그들의 축복을 빌었다. 잠시 후, 식장이 어두워지더니 한 줄기의 핀 라이트가 주인공들을 비추었다. 간주가 나오는 순간, 이나의 시선은 신부에게 세레나데를 부르는 신랑에게 향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 법한, 붉은 조명을 가득 머금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거기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제 손을 꼭 쥐곤, 얼씨구. 금방이라도 흐를 거 같은 작은 방울들이 큰 방울로 이루어 뺨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까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혀를 살짝 입천장에 스쳐 소리를 내었다. 쯧. 저런 게 뭐가 좋다고.
집으로 돌아온 소하는 잠시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더니, 와이튜브를 켰다.
'결혼식, 축가, 신랑 축가'
이런저런 영상들을 연달아 보더니 금세 그 만의 그림을 머릿속에 그렸다. 벚꽃 비가 내리는 날, 천산에서 프러포즈도 했고, 얼마 남지 않은 결혼식에 소하도 힘을 가했다. 사실 그날도 소하는 미리 결혼식 분위기를 살펴보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건만, 단아하게 차려입은 베이지색 셔츠 아래 매치한 검정 롱스커트에 플랫 슈즈까지. 눈을 어디에다가 둬야 할지 모르는 그녀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 식을 제대로 감상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무심한 시간은 흘러가고, 그의 계획은 나름 순탄하게 이뤄지고 있다.
노래, 분위기, 그리고 신부.
이 삼박자가 맞춰져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그림이다.
*
새벽 2시, 역시나 아쉬운 쪽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소하 씨!"
"무슨 일이죠?"
"제가 거기로 뛰어가면 안 될까요?"
수화기 너머로 작게 들려오는 피식거리는 숨소리에 이나는 내심 안심이라도 한 듯 소하에게 털어놓았다.
"제가 정말 이런 말 안 하는 사람인데, 오늘 못 보는 거 엄청 고통스럽거든요."
"하루 안 본다고 안 죽습니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정말 많이 보고 싶단 말이에요!"
"있다가 샵 가기로 한 거 잊었습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잊어요. 지금 잠도 안 오는데 이렇게 전화라도 하고 있으면 안 돼요?"
"안됩니다. 눈이라도 붙여요."
"... 뽀뽀 소리라도 내주세요."
“끊습니다."
"진짜 너무하네... 여튼 정말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에요. 나중에 봐요."
"쪽."
마지막에 난 쪽 소리는 이나 쪽이었다. 그래도 이나는 나름 소하가 아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눈치를 살짝 채,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쿵쾅대며 사그라지지 않는 심장을 인형으로 푹 감싸, 이불을 얼굴 끝까지 덮어 오지 않을 날이라 생각했던, 그리고 아주 많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이 밤 끝에 또 마주한 새로운 시작을 기약하며 억지로 눈을 붙였다.
*
그 시각 소하는 날달걀이라도 하나 풀어 삼켜야 하나, 지금 먹어야 효과가 나타날까, 따뜻한 꿀물이라도 벌컥 마시고 다시 목을 다듬어 아아- 소리를 낼 뿐이다. 새벽에 혼자 고성방가하는 사람이라도 되지 않게 오밤중에 큼큼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금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지만 개의치 않아 하는 소하였다. 그렇게 목이 붓도록 연습하고 연습했던 3분 38초 노래를 준비했다. 모든 시나리오는 오늘로써 끝이다. 소하는 이나의 얼굴을 그리며, 짧았던 하루 끝을 포장했다.
*
예상은 했지만, 여전히 정신이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둘은 오전 6시에 예약한 메이크업 샵을 찾아갔건만 원장님이 오지 않아 30분이 더 지체된 채로 기다렸고, 설상가상 드레스는 다른 결혼식장으로 가버려 퀵으로 받느라 벌써 첫 단추부터 삐걱거리는 상황에 소하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망했네."
이나는 원래도 굳어진 인상이 더 매섭게 구겨진 소하를 보며 괜찮다며 항상 그가 자기를 먼저 안심시키듯이 손등을 토닥이고 다독였다. 오히려 이나가 이런 상황에서 더 침착하게 구는 모습이 사뭇 달라 보였지만 소하의 마음은 여전히 급하다. 준비한 MR 시디와 섭외한 사회자, 모든 것이 시나리오에 맞아야 한다며. 또 되뇌고, 되뇌었다.
*
오지 않았던 시간은 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오후 1시, 태양이 가장 따사롭게 내리쬐고 유리 천장이 햇살에 비춰 일렁이는 물결의 굴곡을 지어내 5월의 꽃 길을 비췄다. 삑- 소리와 함께 마이크를 톡톡 두드리는 사회자의 목소리를 따라 하객들은 일제히 출발점에 눈을 돌렸다. 큰 문이 열리고, 잔잔한 왈츠가 흘러나온다. 사회자의 신랑 입장! 이란 외침과 동시에 소하는 열리는 문 너머로 한 발짝 성큼 내디뎠다. 빛의 물결이 잿빛 머리칼을 비추고, 평소에 입지 않았던 슈트가 어색한지 넓은 보폭으로 붉은 장미 잎이 뿌려진 꽃 길을 즈리 밟았다. 몇 걸음마다 허리 숙여 이 자리를 채운 모든 이들에게 가볍지만 무거운 인사를 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이라도 삼킨 듯, 무거운 구두는 길의 끝에 다다르게 했다.
곧이어 누구나 한 번이라도 들어봤을 만한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소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오늘의 신부를 보며 짧은 순간을 한눈에 가득 담았다. 허리까지 오는 긴 웨이브 머리칼은 느슨하게 틀어 올렸으며, 촘촘하게 짜인 은빛 면사포 너머로 살짝 웃음이 맺힌 얼굴을 은근하게 감추었다. 어깨에서부터 팔뚝까지 감싸 무심하게 툭 걸쳐진 베일과 허리선이 강조되는 곡선 위로 겹겹이 쌓아 올린 백의 데이지꽃 레이스를 둘러 허리 밑으로 넓게 떨어지는 풍성함은 눈의 결정체를 연상시킨다. 손목부터 감싸는 웨딩 글러브와 한 아름 쥐어 쥔 보라색 히아신스의 조합이 순백의 마침표를 찍었다.
자신 앞에 선 그녀의 면사포를 조심스레 걷으니 햇살에 비친 붉은 두 눈동자는 깊은 자색의 눈동자를 담으려 한껏 기대된 모습이 마치 그를 갈망하듯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주례 없는 결혼식에 미리 맞춰둔 성혼 선언문과 혼인 서약서를 한 자 한 자 호흡을 맞춰가며 낭독하고, 왼손 약지에 서로를 새겨 놓았다. 끝으로 내빈께 인사를 올린 뒤 경쾌한 음악과 함께 2부의 서막을 올렸다.
오른쪽 테이블에 자리하던 이나의 팀원들이 우르르 나와 무대를 메웠고, 각자 준비한 형광 선글라스와 어디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스카프를 둘러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밝게 전환했다. 옆에 있는 사람 속도 모르는 이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바탕 웃음바다로 살짝 눈물이 고인 이나는 그제야 소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우리 팀 정말 재밌죠."
소하는 말이 없었다. 다만 빈 곳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해 보였다. 이나는 소하에게 무슨 일 있어요? 라며 잡고 있던 팔을 톡 건드리는 동시에 소하는 사회자 옆자리로 발걸음을 옮겨 단상에 있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마이크에서 나오는 삑 하는 소리에 하객, 조명, 그리고 이나는 그를 집중했다.
잔잔한 간주가 흘러나온다. 차 안에서 자주 듣던 노래, 부케를 꽉 쥔 손엔 땀이 맺히고, 마이크를 쥔 손은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게 손가락 끝으로 박자를 맞추고 있다. 긴장하면 나오는 사소한 습관마저 오로지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신호였다. 잔뜩 굳어진 탓에 첫 음절을 놓쳤지만, 무사히 다음 박자를 탔다. 익숙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가사 속 의미를 한 음씩 눌러 전달한다. 1절이 끝나자 내내 맞추지 못하던 소하의 시선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툭툭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자신을 가득 담은 눈을 맞췄고, 곡의 마지막까지 오로지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은 오로지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나의 깊이 팬 보조개가 작은 호수를 연상시키며 눈매가 휘어지듯 초승달을 그려냈다. 그 모습은 봄을 닮았다.
소하가 마지막 가사를 내뱉었을 때, 오로지 한 사람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이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연신 들리는 박수 소리와 들러리의 신부님! 이란 소리가 흩어졌고, 이나는 소하의 목에 팔을 두르고 눈을 맞추었다. 자수정을 닮은 눈에 감겨버린 이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고, 발갛게 오른 입술을 가볍게 품었다. 소하는 자신에게 체중을 실은 그녀의 허리를 어설프게 감싸 안아 받쳤고, 눈을 감았다.
그리던 대상과 생각하지도 못했던 생소한 공간에 소중한 그 찰나 소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없어졌을 거 같아 다시 눈을 떴다. 세상 모든 사랑을 닮은 눈은 빛을 받아 더운 빛나는 눈망울에 비친 모습에 가장 좋아하는 네 웃는 모습이 어여뻐 너를 따라 해본다. 모든 감각은 온통 서로에게 쏠려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제의 너에서 오늘의 우리라는 새로운 장을 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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