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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결혼식
와스
은한진
여령과 나의 몸이 분리된지도 시간이 조금 지났다.
사실 여령과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제껏 여령이 내 자신이라고 믿고 선택한 것들은 더 이상 내몫이 아니게 되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여령과 함께하는 것에 위화감이 스며들기 시작했었다. 가끔은 어떤 소리들도 들려왔는데 그건 여령의 것이 아니었다. 내 것. 내 기억이었다.
나는 나만의 삶이 있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학창시절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 없이 무난하게 지내며 마음을 나눈 친구들도 많이는 아니라도 서너명 있던, 이제는 직장을 다니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던 그런 평범한 여자. 그런 부분에선 여령과 나는 딱히 다를점이 없었다. 외형도 비슷했다. 허리까지 오는 긴생머리에 조금 마른 체격과 꾸미는 걸 좋아해도 귀찮아서 무난하게 스타일링을 하고 다닌다는 것 같이 그녀와 나는 세세하게 보면 다르기야 하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다를점이 없어보였다.
지니야. 그건 친구들이 나를 애정있게 부르던 호칭이었다. 그리고 그건 곧 나를 나로서 되찾을 수 있었던 열쇠가 되었다. 갈라진 틈새로 간신히 비집고 나오던 하나의 기억은 그를 필두로 우수수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내 건강을 항상 걱정하던 엄마가 직접 만들어주던 과일주스를 마시던 봄, 얼린 주스 하나가 생명줄인 줄 알았던 친구들과의 여름, 떨어지는 낙엽이 괜스레 쓸쓸했던 가을, 어쩐지 유난히도 지독히 마음이 아팠던 어느 겨울.
흘러들어와 마음을 꽉 채우는 추억들은 더 이상 내가 여령으로 있고 싶지 않았던 이유였고 그즈음에는 여령도 자신의 안에 나라는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우린 함께였다. 이곳에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로 있을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기에 가만히 여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으니까.
여령은 내게 약속했다. 꼭 내 삶을 다시 되찾아주겠다고. 나는 그 약속을 지켜주길 간절히 바랐다. 내가 여령으로서 존재하기 싫었던 이유가 단순히 내 기억을 되찾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여령은 평범하게 살다 안타까운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 달의 신이라느니 설화계라느니 터무니없는 소리가 현실이 된 곳에서 여령은 누군가의 구원자이자 심판자로서 이 드넓은 세계를 이끌어야했다. 누군 그게 신성한 운명이라 하겠지만 내눈엔 그저 여령이 가여워보였다. 내가 나로서 살아갈 때 나는 영화를 좋아해 자주 영화관에 갔었다. 친구랑도 같이 갔지만 대부분은 혼자였다. 혼자서 가만히 상영되는 영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화의 내용과는 별개로 마음에 편안함이 잔존했다.
나랑은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바라만 볼 수 있는 입장이란 편한 것이었다. 아무리 잔혹하고 슬픈 일이 벌어져도, 신기하고 환상적인 것들이 튀어나와도 나는 그것에 불안이나 좌절 등 불필요한 생각없이 그저 주어진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 그것들은 내 것이 아닌 것들이니까. 그렇게 한바탕 웃고 울고나면 개운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일 수 있었다. 영화니까.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 영화가 곧 네 새로운 인생이 될거라고 하면 어떨까?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가끔 그런 소리를 한다. 나도 그런 세상에 한번 태어나보고 싶다. 얼마나 순진한 소리인가. 영화가 재밌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내 것이 아니니까 재밌는거다. 그래서 처음에 여령이 곧 나라고 생각했을때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여령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땐 여령에겐 미안하지만 안도감이 먼저 나를 휘감았다.
타인의 시선으로 여령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아이러니하게도 혼란스러운 마음은 사라지고 더욱 깊게 여령의 감정에 집중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런 스스로가 꽤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책임하게도 그때의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여령은 자신이 지게 된 책임감에 짓눌렸고 자신의 살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했으며 또 사랑에 빠졌다. 다채로운 여령의 감정에 감화된 나는 또다시 나와 여령을 착각하며 그녀의 마음에 빠져들었다.
그래선 안되었는데. 후회가 나를 괴롭게 했다. 여령의 마음을 염두하고 닥쳐오는 상황들을 이겨내면서 나는 여령의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게 되었다. 백지한, 이활, 유예. 전부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들인데도 어쩐지 그들의 얼굴을 볼때마다 나까지도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천둥소리와 함께 굉음을 내며 등장하는 백지한이 여령을 향해 사랑을 속삭일땐 남자의 마음이 그 굉음과 닮아있다고 생각했고 유예가 여령에게 충성을 맹세할 땐 남자의 마음이 물처럼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활은, 아직까지도 어떤 사람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그의 설화를 찾았을 때 크게 동요하는 여령의 감정이 나에게도 온전히 전해졌다.
서은한. 서은한. 서은한. 가만히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와 여령의 몸이 분리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내가 여령과 함께하고 싶지 않다고 간절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여령과 더 이상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던 이유. 서은한. 처음엔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여령의 마음이 내게 스며들었다고 생각했다. 서은한을 볼 때마다 놀라서 가슴이 둥둥거리는 거라 생각했고 자꾸만 숨기는 그늘진 얼굴은 누구라도 걱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은한은 참 이상한 남자였다. 아니, 소년일까. 항상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한껏 여령을 놀리다가도 가끔씩 지치고 아픈 목소리로 여령을 걱정하게했다. 그리고 그건 곧 내가 서은한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의미를 도통 알 수 없는 첫대면부터 지금까지 서은한은 내게 무의식의 영역이었다. 신경쓰지 않는다고 여겼지만 정신차려보니 온통 서은한을 떠올리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지만 학교에 다녀본 것 같지도 않고 돌이켜보면 은근 거짓말만을 말해온 것 같은 서은한. 넌 대체 누구야. 여령의 입을 빌려 여러번 물었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여령도 서은한이 신경쓰이는지 서은한에게 전화가 올때마다 몸을 흠칫 떨어댔다.
그뒤로도 서은한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나타나 여령과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서은한을 마주할 때마다 서은한의 상태는 묘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피칠갑을 하고 비틀거렸으면서 다시 만날 땐 겉모습은 멀쩡해보이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모양인지 가쁘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천산의 외진곳에서 만나 여령을 이끌고 악우를 찾으러 갈 땐 그 묘한 느낌이 한층 더 짙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진짜 내 마음도 알 수 있었다. 여령에게 재밌다는 듯 웃으며 손을 잡고 품안에 안는 서은한. 올려다 본 시선이 마주하자 어둡게 내려앉은 보랏빛 눈동자에 담긴 여령의 모습이 보였다. 아. 나는 낮게 한탄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긴거다. 여기 있는 나를, 여령의 의식 속에 푹 잠겨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를 알아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다른 누구도 아닌 서은한이 나를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욕심. 하지만 서은한이 나를 알아볼리 없었다.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존재해서는 안될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계속 여령의 입을 빌려 지내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인어공주인줄만 알았다. 내 목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한 채로 그저 여령을 눈에 담는 서은한을 바라만 봐야 했으니까. 서은한이 여령을 사랑할까? 여령은 서은한이 눈에 밟히는 듯 했다. 결국, 세상은 이걸 바란 걸까. 하루아침에 모르는 사람 몸에서 눈을 뜬 것도 모자라서 누군가를 나도 모르게 사랑하게 되고, 상대는 끝끝내 나를 모른 채로. 그렇게.
그래도 지금의 삶은 내 것이 아니었고 이 이상 여령을 괴롭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언젠간 서은한이 나를 알아줄거라는 허황한 희망과 얼른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어지럽게 할 때 사고가 났다. 여령이 걱정하고 있던 저승아씨의 폭주였다. 누군가가 저승아씨의 설화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쉬이 진정을 하지 못하던 여령이었다. 걱정하던 일이 터지자 여령의 숨가쁘게 뛰는 심장고동이 내게도 느껴졌다. 저승아씨가 사실은 여령을 항상 지탱해주던 수연이었다는 걸 알자 여령은 결국 무너져내렸다. 돌아가자. 눈물에 푹 젖어 절절하게 뱉는 마디마디는 나의 숨마저 옥죄었다. 가슴께가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여령이 아파하는 목소리가 나의 영혼마저 상처입히는 기분이었다.
늘 그랬듯 거짓말처럼 나타난 서은한의 손에 들린 것은 저승아씨, 수연의 설화였다. 그를 보자마자 여령은 절박해졌다. 제발 태우지마. 그러한 말만이 허공을 떠돌았다. 악신을 죽여라. 자격자가 우리를 배신했다. 시끄러웠다. 시끄러워서 전부 다 닥치라고 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조연도 되지 못한 모양이니까. 수연은 서은한의 제의를 끝끝내 거절했고 여령이 싫다고 고개를 저으며 울자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건네며 밝게 웃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설화를 말끔히 태운 서은한의 표정이 냉랭했다. 누나도 결국 똑같았어. 내 머릿속은 그말만이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서은한, 저 아이도 뭔가 할말이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이 미치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지금 여령은 가족과 다름없던 이를 서은한의 손에 의해 잃었다. 그런데도, 계속 여령의 속에 있던 내가 서은한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나는 정말로 여령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마음이 드는게 싫었다. 이젠 정말 싫어. 여령이 이런 일을 당한 것도, 달의 신도, 이런 와중에도 서은한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이 이기심도.
그렇게 생각하며 여령과 함께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은연중에 백지한을 본 것 같은 기억이 나는데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나는 더 이상 여령이 아니었다. ‘진’의 모습이었다. 익숙한 내 방도 내 것이었고 거실에 크게 걸려진 내 아기때 사진도 내 것이었으며 복도를 지나 장식된 친구들과의 인화 사진들도 전부 내 기억이었다. 내 몸을 되찾고 일상으로 돌아온 것에 안도하며 기뻐해야 하는 게 맞지만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험한 일을 당한 여령의 마지막 모습과 서은한. 그리고 정신을 잃고나서 꿈결처럼 만난 ‘선하’도.
나는 선하를 만난적이 없었다. 내가 여령과 함께 있을 때 첫 시작의 기억은 여령과 서은한이 만났을 길목에서부터였다. 선하는 여령이 애타게 찾던 사람이었는데 어이없게도 꿈 속에서 만난 것이다. 선하는 엉망인 내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무어라 말을 했다. 그 내용이 너무 몽롱하게만 느껴져 잘은 떠오르지 않지만 분명 내게 힘을 준다고 했었다. 결말을 바꿀 수 있는 힘. 태워버린 설화를 되돌릴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솔직히 여령과 함께 있으면서 설화계에 대해선 부정적인 감정만 들어 그러한 선하가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게 그 힘이 간절했다.
바로 발길을 돌려 여령을 찾아가려다, 이내 몸을 멈췄다. 이건 여령과 서은한에게 있어 찾아올 한번의 기회. 그리고 나에게 찾아온 단하나의 기회. 난 서은한을 찾아나서기로 결심했다. 서은한은 여령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직접 말로 사랑한다고 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이야기 끝에 자신과 같이 설 사람은 여령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여령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여령의 이야기 속에선 악당이었다. 하나뿐인 친구를 앗아간 악. 나는 그남자를 선인으로 되돌려줄 카드를 가졌다. 나는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인어공주인줄만 알았다. 왕자를 사랑하지만 내 자신의 모습으로는 나설 수 없어 그저 먼발치로 지켜보다 그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질줄만 알았다.
하지만 나는 내 모습을 되찾았다. 진정한 나로 서은한 앞에 서고 싶었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지라도 나는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인어공주도 뭣도 아니다. 여령처럼 그리 마음이 좋은 사람도 아니다. 바보처럼 다 꺼내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얌전히 돌려보내줄 순 없었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내 나름의 방식대로 서은한과 계약하겠다고.
나는 무작정 천산으로 올라가 오두막을 찾았다. 그곳에 서은한이 있을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데 무모함이 자꾸만 불쑥 튀어나왔다. 땀이 흐르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데도 발을 놀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기억 속 오두막이 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조심스레 오두막으로 다가가 오래된 문을 열자 마치 누군가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열렸다. 적막한 가운데 창문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서은한이 보였다.
서은한에게는 내가 낯선 사람일텐데 나를 보고 놀란 기색이 없었다. 내가 한발씩 조심히 다가가자 서은한은 다시한번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는 자세를 바로 세워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가 움찔거리자 서은한은 바람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먼저 찾아와놓고 엄살은.”
서은한은 그렇게 말하며 낡은 탁자에 살짝 걸터앉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여령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탁한 보랏빛 눈을 제대로 마주하니 괜히 발끝이 곱아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이유는요?”
“마치 날 아는 것처럼 말하네. 통성명은 해야지.”“이름은 모르지만..난 그쪽 누군지 알아요.”
“뭐?”
“누나 눈으로 나 지켜보던 사람.”
알고 있었어. 나는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좋은쪽인지 나쁜쪽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기쁜걸까, 아니면 ..
“그래서 용건은?”
여령의 몸으로 보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나에게서 얻을게 있으면 여기에 남고 그게 아니면 가라는 말투. 대답을 이미 들은 기분이 들어 어쩐지 눈가가 시큰했다.
“너에게 기회가 왔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미간을 좁힌 서은한은 내게 시선으로 물음을 대신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짧은 시간 나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리고 꿈속에서 선하를 만난 것까지. 아직까지 능력을 사용해본 것은 아니라 그게 진짜인지는 몰라도 아무것도 시도를 안한채로 시간을 버리는 것 보다는 나았다. 나의 설명이 끝나자 서은한은 흔치 않게 놀란 표정을 해보였다. 나는 그런 서은한에게 제안을 했다.
네가 사랑하는 여령에게 선인으로 남을 기회를 주겠노라. 그녀의 옆에 떳떳하게 서 그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주겠다고. 서은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참 아무런 말도 하지않던 서은한은 내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 나한테 뭘 원하는데. 그의 말이 귓가에 닿고 나는 어쩐지 눈동자 너머로 눈물이 넘실거림을 느꼈다.
사실 네가 재밌어한 건 여령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는데. 네게 들려주었던 그말들, 수많은 선택지들이 사실은 나에게서 나온 것들이라면 너의 마음은 달라질까? 네가 나를 사랑하기만 한다면 너는 그어떤 자격도, 이유도 필요하지 않을텐데. 네가 나를 선택하기만 한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할텐데.
“내가 로망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그걸 이루어주면 내가 말한대로 해줄게.”
“로망?”
“어. 로망이 하나 있거든. 잘생긴 남자랑 보름달 아래에서 결혼하는거.”
“많은 건 바라지 않을게. 딱 두가지만 해줘. 하나, 지금부터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나와 시간을 보낼 것. 다른 하나,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나와 결혼할 것.”
“..어이없네.”“아직 말 다 안끝났어. 보름달이 뜬 밤 나와 결혼서약이 끝나면, 그땐 여령을 찾아가.”
“..”“그게 다야.”
“당신도 좀 미친 것 같네요.”“그건 됐고. 대충하는 결혼식 아니야. 제대로 갖춰입어야해. 나는 드레스 입고 나올거라고.”
알았지? 내가 웃으며 말하자 서은한은 떨떠름한 얼굴로 잠시간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긴데. 내가 부루퉁하게 말하자 서은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재밌네. 그렇게 말한 서은한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부탁해요. 예비신부님.”
“그래. 나도 잘부탁해요. 예비신랑님.”
나는 서은한의 조금은 차갑고 큰 손을 마주잡았다. 서은한은 이 모든게 그저 한겨울의 눈송이처럼 사라져버릴 장난이라 여길지 몰라도 나는 아마 이순간을, 그와 함께할 모든 시간들을, 그와 하게될 밤하늘의 서약을 평생 잊지 못할거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여령의 이야기 속 악역이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 속 걸림돌일지라도. 내가 그의 이야기를 바꿀 수만 있다면. 그럼 이정도는 제멋대로 굴어도 되지 않을까. 맞잡은 손을 바라보다 시선을 위로 올려 서은한을 마주하자 서은한은 예쁘게도 웃어주었다.
“내 이름은 진이야.”
“저는 서은한.”
이게 우리의 첫만남이었다. 나는 웃고있는 서은한을 바라보며 달빛 아래 서서 반지를 나누어끼고 불멸의 입맞춤을 하며 영원의 서약을 읊는 서은하를 그려냈다. 산속 동물들의 환호와 기쁨의 탄성이 울리고 서로 약속을 하면 식이 끝난다. 그럼 나는 서은한을 보내준다. 서은한은 결국 여령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 속 악역이 된다. 이 결혼식은 바보같은 약속이 아니라 내가 네 이야기에 실재했음을 남기는 유일한 흔적이 된다.
부케는 여령에게 던져줘야하나. 슬프게도 실없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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