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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누은한

은한이누나
은누은한

“도움!”

 

“깜짝 놀랐네... 왜 그렇게 급해요?”

 

은누가 상기된 얼굴로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와 은한에게 달려들었다. 다급해 보이는 은누의 모습에 은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등에 불 떨어지기 직전까지는 세상 급할 거 없는 사람이 이렇게 요란하게 구는 건 분명 무슨 큰일이 있기 때문이라 짐작하고, 은한은 기꺼이 도울 요량으로 은누가 내미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보았다.

 

‘여자가 부르기 좋은 결혼식 축가 리스트’.

 

“이게 뭐예요?”

 

“친구가 자기 결혼식 축가 불러달래. 큰일 났어! 빨리 골라서 오늘부터 연습해야 돼.”

 

“흠. 언제 한다는데요?”

 

“내년 5월.”

 

핸드폰 화면의 날짜는 아직 4월 초였다. 아직 1년 넘게 남았는데, 벌써? 보라색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은누는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진짜. 1년밖에 안 남았다고. 내가 친구한테 창피를 주면 어떻게 해? 지금부터 열심히 해야 적어도 부끄럽게는 안 하지.”

 

은한이 픽 웃음을 흘렸다. 남에게 피해 주기 싫어하는 성격에 1년이면 바로 내일인 것처럼 초조하긴 할 터였다. 은한이 바닥에 앉아 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에 앉아요. 은누는 이미 여러 번 해본 것처럼 그의 품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두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자세였다. 은누가 아기자기한 물건을 가져다 놓아 제법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오두막 안에서, 체온이 겹쳐져 봄기운이 완연했다. 보이지 않는 공기의 꽃이 만개한다.

 

음원 차트를 훑어보고 흥얼거리기를 한참 반복하자 후보곡은 두세 곡으로 좁혀졌다. 은한은 그저 은누가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조금만 더요, 다른 노래도요, 한 마디씩 덧붙였다. 그러니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의 결혼식에 쓸 노래를 고르는 데에 은한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많지 않았다. 알고 있었음에도, 은누가 불만스럽다는 듯 은한의 다리를 찰싹 내리쳤다. 은한이 웃으면서 좁은 어깨에 제 턱을 기대고 연인을 꼭 끌어안았다.

 

“누나. 우리 결혼식 때에는 뭐 부를 거예요?”

 

은한이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은누가 흠칫 놀라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묻는다.

 

“나랑 결혼할 거야?”

 

이번에는 은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상처받은 목소리가 은누의 귀로 들어와 심장을 콕콕 찔렀다.

 

“그럼 안 할 거예요?”

 

“아아악! 아니! 당연히 하지! 그런데, 네가 먼저 말할 거라고는 정말 생각을 못해서... 너무 놀라서...”

 

“됐어요.”

 

으아아. 은누가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하다 은한의 등을 답삭 껴안았다. 진짜 미안해. 화내지 마. 은한이 웃으면서 저를 껴안은 팔을 토닥였다. 내가 어떻게 누나에게 화를 내요. 은누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수없이 얼굴을 살피고 뺨에 입을 맞추며 그의 마음을 살폈다. 진짜 화난 거 아니라니까. 은한의 부드러운 입술이 은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드러난 둥근 이마에 닿았다.

 

“그게... 물론. 나와의 미래를 당연하게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 그런데... 은한이는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즐거움 중에 아주 일부만 나랑 나눴을 뿐이잖아. 그래서 더 많은 걸 알게 해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 은한이가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습에 묶이는 걸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기도 해서, 불안했고.”

 

“누나. 그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마음인지 알아요.”

 

긴 손가락이 다가와 자신보다 한참 작은 손에 깍지를 꼈다. 손가락을 얽는 것. 어업이 중요한 어느 나라에서는 그물을 결혼식에 사용한다 했던가.

 

“어쨌든... 제가 아직 청혼을 안 했으니까. 누나가 생각을 바로 못하는 것도 당연하죠.”

 

“하하. 그러게. 청혼을 먼저... 어?”

 

우리 누나, 오늘 고장 많이 나네. 다시 굳어버린 은누의 손에서 핸드폰이 툭 떨어졌다. 이거 고장 나면 누나 또 속상해하겠지. 은한은 떨어지는 핸드폰을 기민하게 잡아 은누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인간들은 여기에 반지 끼워 준다면서요.”

 

은한이 잡고 있던 손을 들어 네 번째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누나가 내 반려가 되어 준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누나가 마음의 준비를 마치는 날에, 청혼 할게요. 거절하지 말고. 나랑 꼭 결혼 해줘요.”

 

“정말?”

 

우리 은한이가 이런 말을 다 할 줄 알고. 장난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기특해서인지, 감동적이어서인지 순식간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누나를 보면 사랑을 알 것 같아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전에, 입술이 눈가에 찾아들었다.

 

“누나가 내게 준 그... 다정한, 수많은 약속. 사랑. 전부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약속만큼은 반드시 나누고 싶어요.”

 

분명 축복과 기쁨이 가득한 결혼식은 아니겠지. 하얀 웨딩드레스, 검은 턱시도.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피아노 울리는 결혼 행진곡. 은누는 은한과의 결혼이 어릴 적 상상하던 결혼식과 거리가 멀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그 어떤 설화와도 비교하지 못하게 강한 인연으로 엮인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날일 것임을 알았다. 이건 그들이 스스로 써 내려간 이야기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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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Sereno, Benicx - 마지막 세계의 왈츠 (Orchestra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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