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제목-없음-1 (2).png

지한서율

은하
지한서율

시간은 흘러 어느덧 1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 동안 너란 사람은 한결같았다.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것도 힘든데 애정 또한 식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지한을 만나기 전에는 사랑이란 감정에 이만큼이나 휘말릴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었다. 일할 때도 감정을 내비치는 법이 없던 서율이기에 연애한다는 소식에 다들 믿지 못하는 눈치일 정도였으니까.

 

물론 선의의 거짓말로 애정이 식었다 해도 눈빛 정도야 연기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반짝 빛나는 그 금안을 보면 아무도 그렇게 생각 못 한다. 물론 이렇게 얘기하는 서율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좋아서 사귀었던 모습이 나중엔 오히려 질려서 헤어진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백지한은 매 순간이 감동 그 자체였다. 살면서 나를 이렇게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을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같은 지역에 살지 않고, 같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면 오늘 이 동창회에 올 일도 없었겠지. 물론 같은 학교를 다녔다고 해서 우리가 그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사회에 나와서 뒤늦게라도 만났고 연인으로 이어진 것은 운명 아니었을까.

 

 

서율은 아직도 거래처 미팅에서 지한을 만났던 날이 선명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워낙 튀는 외형에 불량배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돌아서 처음엔 지한이 대표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회사마저 오해했었다. 다행히 오해는 금방 풀리고 동창이라는 공통분모까지 있었기에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아, 또 하나 믿지 못할 사실. 지극히 평범했던 나란 사람을 너는 왜 알고 있었고, 첫사랑이라고 얘기했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의 끝에 너란 사람 자체를 모르고 살았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부르르 떨었다. 상상도 하기 싫네.

 

 

"괜찮아? 술 그만 마셔야 하는 거 아니야?"

 

 

서율이 아니었다면 이런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지한이 갑자기 부르르 떠는 서율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춥거나 취기가 올라서 한 행동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주량이 약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걱정하는 건 여전하네.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웃어 보였지만 지한은 여전히 서율을 품에 숨기다시피 안았다. 아무에게도 널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결혼하고 나면 잊어버릴 사람들에게 굳이 청첩장을 줘야 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한은 서율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의 모토는 항상 '서율이 네가 좋다면 난 괜찮아.' 였으니까. 무수한 시선이 느껴진다. 부러움과 시기가 뒤섞인 부담스러움. 그 시선을 너는 받지 않았으면 해서 괜히 더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율은 잠자코 그 품에 갇혀있었다.

 

 

지루한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서율이 취한 게 아니냐는 눈치 빠른 한 녀석 때문이었다. 망설임 없이 서율을 데리고 나가는 지한의 뒤로 애인밖에 안 보이냐며 성화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어쩌라고. 서율이 취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부축하며 나왔다. 분명 이 분위기를 깨기 싫으니 취한 척 기대고 있는 거겠지. 녀석들이 서율의 주량을 모른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알았다면 눈치 없게 술을 더 마시고 가라며 붙잡았겠지. 과연 거기서 내가 참을 수 있었을까.

 

 

 

"지한아-"

 

 

 

술집에서 꽤 멀어졌음에도 서율은 저를 붙들고 걷는 지한을 불러 세웠다. 품 안의 서율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지한은 순순히 서율을 놓아주더니 곧바로 등을 돌리고 무릎을 굽힌다. 업혀. 너른 등판에 망설임 없이 몸을 기댔다. 언제든 저를 받쳐주는 든든함에 기분이 좋아져 작게 얼굴을 부볐다. 그 움직임에 낮은 웃음소리가 등을 타고 울린다. 밤바람이 불어 서율의 머리칼을 약하게 흔들어 놨지만 봄이 와서 그런지 차갑지만은 않았다. 취하지도 않은 술이 올라오려나.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작게 발을 까딱이니 지한이가 서율이를 한 번 고쳐 업는다.

 

 

 

"쉬었다 갈 겸 딸기 우유 사줄까? 전부터 좋아했잖아."

 

"너한테 말한 적 없었을 텐데? 어떻게 알았어?"

 

"… 잠결에 말했어. 어찌나 좋아하는 게 많던지."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10년을 보고 지낸 서율이 그 짧은 침묵을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서율에게 숨기는 게 없던 지한이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서 일단 지나가기로 했다. 뭐, 진짜로 잠결에 딸기 우유 사줘, 지한아. 했을지도 모르지. 실제로 딸기 우유를 좋아하는 것도 맞고. 학교 다닐 때 밥처럼 자주 마셔서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딸기율 일 정도였으니까.

 

 

"호…. 그럼 내가 뭘 좋아하는지 더 말해보시지?"

 

"잘생긴 나를 제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무튼. 코너 돌면 학교인데 오랜만에 가볼까."

 

"… 잘났어, 진짜."

 

 

 

편의점에 업은 채로 들어가겠다는 지한을 말리느라 술이 다 깨버린 서율은 지한이 사온 우유를 받자마자 한 모금 쪽 마셨다. 술 깨기 위해서 마셔본 적은 없는데 나름 괜찮았다. 졸업하고 나서는 살기 위해 커피만 마셔서 딸기 맛 우유를 마셔본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마시고 있으니 학창 시절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야자 한다는 핑계로 친구들이랑 간식 엄청 먹었었는데 가끔 누가 책상에 우유 두고 가기도 했었지. 졸업할 때까지도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조용히 지내던 나한테 누가 관심이나 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 졸업식 때 와줄 가족이 하나도 없어서 혼자 쓸쓸하게 있던 나에게 작은 꽃다발을 대뜸 주고 갔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그게 너라는 걸 바로 알았다면 우리 인연이 더 빨리 이어졌을까.

 

졸업식 이후로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학교는 추억을 간직한 채 그대로였다. 낮이던 밤이던 이 학교 풍경 하나는 끝내줬지. 꽃이 핀 나무 아래서 떨어지는 꽃잎을 잡겠다고 폴짝 뛰던 어린 시절의 서율은,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에 좋아하는 이가 없어도 잡으려 애를 썼다. 노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자리에서 바스락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친구들과 꺄르르 웃던 추억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것처럼 차곡차곡 일기장에 쌓여갔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추억들이 애틋해지는 걸 보니 나이가 들었나.

 

 

 

"무슨 생각 해?"

 

"학교에 오니까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지내던 학창 시절이 생각나서. 그러고 보니 그때 왜 나한테 고백 안 했어? 좋아하는 우유도 주고 꽃다발도 주고 갈 정도면… 솔직히 그 후에 다시 찾아올 줄 알았어."

 

"너한테 갈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사실 너 몰래 꿈도 꿨어."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 둘 주며 호감을 쌓고 잊지 못할 고백을 해서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먼저 네 손을 잡는 꿈.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네게 소극적으로 대하자 먼저 입을 맞추는 네 모습도. 감히 상상해봤어. 한 번 너를 탐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네게 손을 뻗을까 봐 겁이 났어. 알잖아. 나는 너에게 한없이 약하고 조심스러운 거.

 

뜻밖의 고백을 듣고 있으니 마치 10년 전 고등학교에 와있는 기분이었다. 딸기율이라 불리는 서율을 보며 몇 날 며칠 고민해서 딸기 우유를 사고 그 마저도 부끄러워서 책상 위에 올려둘 생각을 했을 그 시절의 백지한이 사랑스러워서. 그 마음을 당시에 알아차리지 못해서 네가 그런 상상까지 했다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밀려들어서. 서율은 어느새 비운 우유를 내려놓고 지한의 품에 안겼다.

 

 

 

"그럼 다시 해줘."

 

"뭘?"

 

"그때 전하지 못한 마음. 이미 10년이나 지나버렸지만 기억하지?"

 

"당연하지. 그건 몇십 년이 지나도 기억나."

 

 

빤히 바라보자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금안이 자신감으로 빛났다. 10년 전에도 이런 눈빛으로 당당했던 그였다. 좀 더 빨리 알아챘다면 좋았을걸. 후회는 들었지만 뭐, 앞으로 같이 할 날이 훨씬 많을 테니까. 달빛에 가려 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손으로 하늘을 가렸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지한이 서율에게 허리를 숙여 등을 감싸 안고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옛날이야기를 하는 지한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흘러와 서율의 마음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10년 전에 처음 보자마자 느꼈어. 앞으로 내 취향은 오로지 너일 거라고. 물론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더 좋았겠지만 상상으로만 그쳐도 행복했어. 거기선 네가 날 향해 웃어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여줬으니까. 아, 꽤 대담하게 나한테 뽀뽀하는 상상을 했던 건 미안. 내가 생각한 네 모습은 그럴 것 같았거든."

 

"분한데 맞는 말이라서 짜증 나. 짜증 날 정도로 좋다는 말이야."

 

"하하…. 그랬어? 졸업식 때 엄청 용기 냈는데. 바보같이 그때도 제대로 마음을 전달하진 못 했지만, 어쩐지 우리는 다시 만날 운명 같았어."

 

 

 

운명이라는 말에 서율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어떻게든 만나서 연인으로 이어진 것은 운명 아닐까 생각했던 조금 전의 본인이 생각나서. 서율의 등을 감싸 안고 토닥이던 지한에게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췄다. 달빛에 가려졌던 얼굴이, 울고 있지만 환희에 찬 모습이 이제야 환하게 비춰졌다. 지한아, 너는 아마 내가 인생에서 제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하게 될 운명일 거야.

 

 

 

"그러니까 한 서율. 다시 한번 얘기할게."

 

 

 

잘게 입을 맞추던 네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온다. 그 사실 만으로도 벅차서 숨이 턱 막혔다.

 

 

 

"나의 반려가 되어줘."

 

 

 

평생, 영원이라는 건 없겠지만 그런 미래를 꿈꾸고 싶은 사람은 일평생 너 하나뿐일 거라고.

 

 

 

"내게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평생의 기회를 줘. 나의 신부님."

 

 

 

기꺼이 내 반려가 되어주는 너를, 눈을 감는 순간까지 사랑하겠노라고.

©Copyright Does God work overtime? DON'T RE-POST ARTS

BGM : Sereno, Benicx - 마지막 세계의 왈츠 (Orchestra Version)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