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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포네


활여령

1

 

5월은 봄이었다

 

북부 지역은 조금 서늘하긴 했지만 그래도 봄이었다. 계절의 신호를 알리듯 맺힌 튤립의 꽃봉오리가 그 증거였다.

 

그녀의 양부모는 꽃을 좋아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꽃이 만개한 정원 한가운데 파티를 차리고 다른 이들에게 주목받기를 좋아했다. 가식적인 웃음이 만발한 장소. 그 환하고 찬란한 정원에선 누구도 꽃 한 송이 제대로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다. 그저 어여쁘게 피어나는 것이 역할의 전부인 듯. 그들은 조용하게 숨을 죽인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생명이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소리 하나 낼 수 없다. 그들도 결국 속물적인 귀족의 노름이었음을. 다가오는 봄을 맞이할 때마다 새삼 깨닫게 된다.

 

듣도 보도 못한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를 어여쁘게 잘 키워낸 것은 제 양부모들의 트로피가 되어준다. 정원의 꽃들과 다를 게 없다. 정말로 다를 게 없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힘이 없었다. 기억이 있던 시절부터 저를 거둬 길렀던 자작 부부. 그녀에겐 그들을 거스를 힘이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도 파티 한가운데 어설프게 놓인 인형을 스스로 자처하는지도 모른다. 이방인이라 수군거리는 기분 나쁜 말, 대충 욕설 같은 것들은 적당히 흘려보낸다. 어차피 얼마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낯선 곳의 언어를 몰랐다.

가르쳐 주는 이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석연찮은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디서 왔고, 무슨 말을 하고,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여지껏 죽을 위기 한번 없이 그냥 그렇게 잘 살아온 게 어디인가. 때문에 굳이 궁금하다 여겨본 적은 없던 것 같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게 행운이 뒤따라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적어도 아직은 그러했다. 출신을 중시하는 귀족들의 시선이 따갑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적당히 견딜 만은 하였다. 제 코끝을 찔러오는 꽃향기가 독하다면 더 독한 것이었으니.

 

파티가 끝나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녀는 발을 아프게 하던 구두를 벗어 던졌다. 막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은 언제나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용인을 모두 물리고 힘없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커튼으로 가리지 않아 밖이 전부 보이는 창밖에는 새빨간 태양이 지고 있었다. 저택의 자랑이었던 정원은 언제 사람이 모이기라도 했냐는 듯이 휑하고 적막하기 그지없다. 고요 위로 넘실넘실 엉켜대는 노을의 붉은 실. 전부 부서질 빛이고 아름다움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까만 어둠에 잠식되어버리고 말 찰나. 그런 것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눈을 감았다. 휴식이 필요한 밤이었기에 수마는 빠르게 찾아왔다.

 

 

2. 수선화

 

봄의 호숫가에는 노란 꽃이 핀다.

 

잠에서 깨어나 홀린 듯이 향한 호수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아직 남아있는 졸음을 깨워 줄 정도로 차갑고 습한 공기가 살갗과 맞닿음으로 인해 저절로 일어나는 솜털. 그러나 여전히, 몽롱한 꿈의 장소인 그곳은 그녀를 더 깊은 환상 속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유난히도 밝은 달빛이 채 가시지도 않은, 굳이 따지자면 아직은 한밤중에 가까운 새벽. 얇은 잠옷 차림이었지만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는 그녀는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별을 닮은 꽃.

그리고 달이 떠오른 호수.

 

밤하늘을 옮겨 그린 듯한 예술품처럼 아름답다. 꽃이라면 이제 질색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다른 건 다 싫어도 이것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출렁거리는 호수 결을 따라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렸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기다렸다. 따분하게 하품을 하기도 하고 떨어진 꽃잎을 손바닥에 올려 개수를 세어가며 보낸 의미 없는 시간. 어쩌면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이 짙은 안개가 걷히고 온전한 달의 호수가 드러나기를 기다린 걸 수도 있었다. 그 고고한 달빛조차도 안개에 잠식되어, 그녀의 밑엔 그림자 하나 펼쳐지질 않았으니. 이 모습은 해가 뜬 뒤에는 영영 볼 수 없겠지. 그리 생각하니 어쩐지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두 다리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이곳에서 다시 잠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그렇게 된다면 사용인도, 집사도, 그녀의 양부모도 그녀를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한 기분에 그녀는 제 팔에 기대 기다란 숨을 내뱉었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안개가 깨끗하게 걷혔다.

 

 

호수의 달은 더 선명하게 떠오르고,

짙어지는 그림자와 수선화의 향기.

 

그리고 그날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났다.

 

 

 

금빛이라기엔 탁하지만 또 저와 비교하자면 한없이 밝기만 한 색.

 

호수의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마치 신(神)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드디어 이곳이 꿈속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품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까.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번뜩이는 청회색의 빛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도 그녀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가 어떤 말 한마디를 내뱉기 전까지는.

 

“한참, 기다렸어요.”

 

그가 말하는 기다림의 상대는 명확했다. 느른하게 웃는 얼굴은 어딘가 부드럽게도 보이지만서도 차가운 면이 분명히 존재했다. 마치 새벽의 공기처럼.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흐트러짐이 없다. 무언의 압박감. 그녀는 이곳에서 그저 달이 뜬 호수를 마주하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정작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지만 어째서인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물쩍거리며 입술을 물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속으로만 삼킨 말들을 끊임없이 되뇌인다.

 

 

왜.

왜 나를 기다렸을까.

당신은 검은 머리도 아니면서.

 

 

그녀는 그를 몰랐고 그도 그녀를 몰랐지만 돌고 돌아 닿은 켜켜이 쌓여놓은 세월의 탑 속에서 언젠가 저런 밝은 머리칼을 본 적이 있다는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이고 속에서는 파도가 친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새벽안개로 꽃잎에 이슬이 맺히듯, 길게 늘어진 그녀의 속눈썹 아래에도 물방울이 맺힌다. 금방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어서 그녀는 이 모든 게 안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진작에 걷어진 지 오래였음에도. 그렇게라도 다른 원인을 찾지 않으면 정말로 이 꿈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단 생각이 들어서.

 

모든 건 착각 속에 시작되었다. 꿈속의 호수와 수선화. 차가운 안개. 수상한 남자. 달빛을 받은 제 몸이 빛나고 있는 것만 같다는 착각.

 

그리고 정체성.

 

 

그녀의 정체성은 역할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녀의 역할은 도구, 혹은 열쇠. 새로 얻은 자작 영애의 신분에는 양부모인 자작 부부에게 보답해야 할 의무가 따라온다. 어찌 보면 희생이라 불릴 법만 한 불평등한 사상. 그러나 이곳에서는 당연시 되어지는.

 

그래서 한 번도 스스로가 누구인지는 고민해 본 적도, 착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삐이-.

 

“--.”

 

꿈에서조차 이어지는 상념을 깨트린 건 귓가에 이명처럼 번지는 소음이었다. 남자가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다. 물속에 들어간 것마냥 귀가 먹먹하고 눈앞이 흐려진다. 지금 쓰러지는 건가? 놀랍게도 그녀는 그걸 눈꺼풀이 반 이상 닫힌 이후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잠에 들 시간이라고.

 

 

 

다시 깨어났을 때 보이던 건 어느새 익숙해진(익숙해질 날이 올 거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제 방의 천장. 피부엔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었으나 그건 창문을 조금 열어뒀기 때문일 테지. 그것 말고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정말 꿈이라고 생각했다. 다 꿈이라고. 저택 호숫가에 만개한 수선화를 보고도 그리 생각했다. 기묘한 새벽의 꿈은 그렇게 착각의 늪에 빠져 마무리되는 줄 알았으나-.

 

 

 

 

 

3. 지하의 왕

 

수선화는 지하세계에 피는 꽃이라고 하던가.

 

어두컴컴한 하늘. 우뚝 솟은 그림자. 쉴 새 없이 악인이 드나드는 곳. 지하는 항상 그렇게 묘사되어왔다. 하데스는 죽은 자들의 신이자 저승의 지배자였다. 지상에서는 흔히 말하는 악당이었고. 또 그 이름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여 저주의 취급을 받기도 한다. 개중에는 그가 아주 험악하고 흉흉하게 생겼으며, 머리가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를 데리고 다닌다는 이유로 공포의 대상이 된다고 표현한 이도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그를 기피했다. 오직 지하의 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책에 수록된 삽화는 정말이지 노골적이고 끔찍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어릴 적에 받았던 신화 수업을 떠올렸다. 그런 지하의 왕이 사랑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선생님이 농담처럼 던졌던 질문을. 운명의 장난인지 에로스의 계략인지는 몰라도 그는 풍요의 여신을 사랑했다. 그를 종용한 제우스와 납치된 페르세포네. 석류알을 삼켜버린 나머지 온전히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엔 지하의 여왕이 되어버렸던 여신. 데메테르는 슬픔에 빠지고 지상은 점차 척박해지고 마는, 그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일방적인 사랑.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이 그저 진실이기만 할까?

 

 

 

사람들은 그랬다. 그들은 이야기의 한 쪽 면만 보고 평가하길 좋아하는 족속들. 그 이면은 굳이 시간 내어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언제나 외면당하는 건 그림자가 된다는 뜻.

 

그게 무엇이 됐든 간에.

 

 

모순적인 사랑을 이해하기에 그 당시의 그녀는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였을 뿐이었으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가정이 있다. 어쩌면 페르세포네는 진심으로 하데스를 사랑하진 않았을까. 하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아는 선생님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석류알을 삼킨 것이 누구의 의지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그 말을 아주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누군가 듣는다면 그저 꿈같은 이야기라고 비판할 생각. 그러나 꿈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때로는 현실이 꿈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경우도 생겨나기 때문에.

 

 

그래, 가령.

그녀가 자작에게 통보받은 갑작스러운 혼담이라거나.

 

 

매일 태양이 떠오르는 것만큼이나 밤하늘의 달도 떠오르기 마련이다. 새벽이 깊자 그녀는 또다시 호숫가를 찾는다. 어딘가 절망할 구석을 찾지 못해서 마냥 꿈만 좇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호수의 안개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이 가려져 볼 수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아무것도. 잠시간의 황무지라도 엿보고 오기라도 한 듯 손에 닿는 건 그저 생생한 잎의 감촉뿐. 그래서 그녀는 노란 수선화를 꺾었다.

 

하데스.

하데스.

그 이름을 불러 보지만 거기에 대답하는 이가 있을 리가 없다. 왜? 그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페르세포네가 아니야. 납치할 지하의 왕도, 맹세할 스틱스 강도, 삼켜버릴 석류알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 오로지 꺾어 쥔 수선화만이. 그건 마치 그날의 꿈의 자락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려서 눈물이 난다. 여전히 이유는 없이.

 

 

 

 

 

4. 혼담

 

봄꽃이 피고 지는 시간은 짧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파티는 세 번, 사교회는 총 다섯 번이 열렸으나 그녀가 참여한 건 겨우 두 파티뿐이었다. 하나는 황궁에서 열렸던 2황자의 생일 파티(모든 귀족이 의무적으로 참여했었다.)였고, 나머지 하나는 그나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후작 영애의 사교 모임. 그 외에는 초대장조차 받지 못했다. 그걸 보고 자작이 뭐라 했더라. 생각했던 것보다 더 쓸모가 없다-. 의 뉘앙스였던 것만 기억한다.

 

귀족의 결혼 시장은 일종의 경매 시장과 같다. 시장에 나온 상품에 상응할만한 대가를, 혹은 남들보다 많은 값을 치르는 자가 좋은 상품을 얻을 수 있다. 사교 모임에 나온 영애들은 각자 자신들의 상품 값어치가 얼마나 될지를 계산하고 비교한다. 그녀는 그게 그렇게 진저리나고 피곤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제 가치는 모두 부모(혹은 가주)로부터 나오는 것을.

 

그날 모임에 참석한 영애 중 한 명인 첼슨 자작 영애는 별안간 눈물을 보였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냥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슬프게 울었던 것 같다. 예순이 넘는 남쪽 영주와 혼담을 맺었다 했었나. 주변의 영애들은 모두 그녀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섣부른 말 한마디가 위선이 될 수도, 아니면 그곳에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었으니. 어찌어찌 달래주며 서로 눈치만 본다. 결국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종료되어버린 모임. 예정보다 더 짧게 만나고 헤어진 영애들은, 아마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더 많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공감하는 이들과 안도하는 이들로 나뉜다.

 

그녀도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지난 저녁을 회상한다. 적막했던 식사 시간. 무표정한 자작 부부. 그리고 들려오던 그녀의 혼담 소식. 사실 그녀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늦은 시기이기도 했으나 이런 갑작스러운 통보는 언제나 좋은 소식을 전해준 적이 없었다.

 

 

정혼자는 사십칠 세.

 

그녀와는 스무 살의 차이가 나는 백작이었다. 언젠간 저에게도 닥칠 것이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아무것도 안 해도 손발이 저릿해지는 게 느껴진다. 결국 먹은 저녁 식사는 전부 체하고 말았고.

자기 전에 위장약과 소화제를 가지고 오던 하녀를 보며, 그녀는 앞으로의 식사는 방에서 홀로 가질 것을 다짐했다. 그들의 낯을 마주한 채로는 도무지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무엇보다 원망이 컸다. 그것도 스스로(이방인)에 대한. 차라리 진짜 피를 이은 가족이었다면, 그랬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는.

 

 

망가진 도구. 녹이 슨 열쇠.

그런 제 가치는 얼마나 되었던 걸까. 결혼과 함께 자작이 받게 될, 티벤트 산맥에 위치한 크리스털 광산? 적어도 그만큼은 되었을까. 하는 무의미한 계산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우욱.

 

순간 그녀는 치미는 구토감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끼고 있는 레이스 장갑이 까슬하게 입술에 닿아온다. 손가락의 틈으로, 작은 콧구멍으로 겨우 가늘게 호흡을 한다. 창문이라도 열어둘 것을. 마차 안의 공기는 고인 그대로 역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마실만은 했다.

 

마실만은 했다.

그건 최선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견딜 수는 있는 상태.

 

 

어느새 올라온 토기는 진정은 되었지만 여전히 낯선 감촉이 생생하다. 그녀는 이번에 평생 가져본 적도 없는 마차의 멀미를 한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녀도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그냥 그렇게 여겨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안했다.

 

 

 

저택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하녀와 호위 기사는 보이지도 않다는 듯.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서 당도한 곳은 어느새 안개가 걷힌 호숫가. 수선화는 없었다. 이미 진작에 다 시들해지고 져버린 지 오래였으니.

 

그녀는 꽃이 다 떨어진, 며칠 전까진 예쁜 별이 가득했을, 이제는 잡초뿐이 남지 않은 호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드레스에 풀물이 들 거라는 잔소리는 잊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만 있었다. 지난번 꾸었던 꿈과 다를 게 없이. 그래도 한 가지 차이점을 찾으려 한다면, 그날 그녀는 조금 서럽게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까 첼슨 영애를 위로해줄 걸 그랬다. 비록 때늦은 후회이긴 하였지만.

 

 

 

나는 누구지?

 

되물어도 대답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건넨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다.

 

 

 

 

 

5. 결혼식

 

잠깐의 우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시간은 멀쩡하게만 흘러갔다.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 저를 향해 꺅꺅거리는 하녀들을 향해 무미건조한 감상을 남겼다. 어차피 다 저를 위해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었다.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지도 모를 입바른 소리들.

 

짧은 듯 길었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예고된 일정은 눈 깜빡하는 사이 다가오곤 한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주위에서 착착 진행되는 예식 준비. 아무래도 신부는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며칠 전 결혼식을 올렸던 또래 영애가 하나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선 몇 안 되는, 선량한 백작 부부와 영애를 기억한다. 그녀는 식을 올리는 전날에 어머니와 함께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고 한다. 아쉬운 눈물과 함께.

 

이상적인 가족이란 저런 것일까. 결혼식이 코앞에 닥친 와중에도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그러던데.

 

결혼은 살아온 집을 떠나 독립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일이라고. 그러나 자작저는 원래 그녀의 집이 아니었다. 백작 부인, 이 호칭 또한 아마 평생동안 입에 붙지 않을 것이다. 어떡하지. 그녀는 함께 울어 줄 친어머니도 없는데.

 

 

 

무서워.

 

인기척 하나 없는 신부 대기실에서. 새벽부터 공들인 화장이 무너질까, 그녀는 차마 울지도 못하고 두려움만 삼켜댔다.

 

 

 

 

아름다운 행진곡. 온갖 하얀 꽃으로 장식된 예식장. 겉으로는 웃으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 여기서 어울리지 못하고 붕 뜨고 있는 건 역시 그녀밖에 없다. 처음으로 버진로드를 밟는 기분은 글쎄. 구름을 걷는 기분도, 그리 꿈 같은 기분도 아니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걸음이 아주 짧은 시간 만에 목적지에 당도하는 순간, 그녀는 피하고 싶었던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으니. 차라리 지옥 길을 걷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던 중년의 백작과 나란히 서서 눈앞에 사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신랑 신부가 나누는 맹세. 지루하고 따분한 사제의 말들이 뭐라 뭐라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탕.

그러는 순간에 들려오는 파열음.

 

 

파열음? 갑작스럽게 고막을 때린 현실성 없는 소리에 그녀는 멍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 옆에 서 있었던 키 작은 백작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발밑에서 찰랑거리는 붉은색 액체가 땅에 닿은 드레스를 타고 서서히 올라온다. 그녀는 사람이 총에 맞는 것을 처음 보았다. 때로는 현실이 꿈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경우가 있다지만 이건,

 

발밑에 흐르는 피.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정혼자의 죽음.

 

예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고야 말았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목격한 건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꽁지 빠르게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몸놀림. 아마도 이십 년은 가까이 지켜봐 왔을 양부모들의 뒷모습. 연달아 말이 되지 않는 장면들을 망막에 새기고 나니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감을 느꼈다. 말 그대로 차갑게.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심장박동이 머릿속에서도 쿵쿵대고 울려댔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밀려오는 두통과 귀를 찢을 듯 시끄러운 소리들. 그녀는 생각했다.

 

 

이건 꿈이라고.

그건 일종의 버릇 같은 거였다.

 

무서운 일이 일어났을 땐 항상 그랬다. 꿈이라는 인식은 대부분은 그녀를 절망에서 깨어나게 해주었고, 그러면 잠시간은 잊을 수가 있었다.

 

 

꿈이구나. 꿈. 그렇게 단정하고 나니 손발은 여전히 차게 식어갔지만 울리던 머리가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녀의 다문 잇새로 비실비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상황에 맞지 않은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하하. 하고 커다랗게 웃지 않은 게 어디인가.

 

어쩌면 그녀가 이 세계에서 처음 눈 떴을 때부터 펼쳐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그녀는 식장 저편에서 홀로 태연히 저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아마도 그는 방아쇠를 당긴 사람. 누군가를 죽이고,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 그는 점점 흐릿해져 갔다. 안개처럼 아스라이 사라져버릴 그 모습에 그녀는 발을 떼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는 못한다. 질척이는 구두 소리. 피에 젖은 웨딩드레스. 그와 대비되는, 어둡게 빛나는 청회색의 눈동자를 눈에 담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안개 속에서 무너지듯 정신을 잃어버렸으니.

 

 

 

6. 부서지는 꿈

 

「한참, 기다렸어요.」

 

그때와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가 어디지? 사방은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눈을 떴다. 사실 눈을 떴다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뜨든 감든 눈앞에 보이는 건 없다. 그저 물속에 들어간 듯 먹먹하기만 할 뿐. 그건 틀림없이 지난번에 꿈과 같은 현상이었다. 몽롱히 부유하는 육체.

 

 

「여령.」

 

 

여령.

그건 지난날엔 들리지 않았던, 착각이라 속이고 묻어놨던 명제.

 

 

이름이었다.

 

오래도록 찾아 헤맨 답.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리며 뛰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 반대였다. 뛰지 않는다. 서서히 멎는다.

 

 

아득한 심연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든다.

 

 

 

 

 

7. 명계(冥界)

 

지하의 왕을 마주하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차츰 맑아지는 시야로 저가 있는 곳을 파악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온몸은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다. 어둠에 잠식된 두 눈꺼풀만이 편안하게 들어 올려졌다. 커질 대로 커진 동공이 익숙하다 느낄, 단 하나의 빛조차 비추지 않는 곳이라니.

그렇게 겨우겨우 일어나 처음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일어났어요?”

 

 

꿈속에서(그리고 식장에서도) 만난 수상했던 그 남자.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

 

그녀는 갑작스러운 경계심을 거두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창문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중간 크기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밖은 새카맸다. 지금이 밤인가? 싶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고쳐야만 했다. 밤이 아니었다. 그냥, 정말, 깜깜한 밖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無의 장소. 소설에서만 묘사하던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덜컥 드는 겁에 그녀는 다짜고짜 그에게 물었다. 날 왜 이리로 데려온 거예요?

 

그러자 이어지는 그의 질문.

 

 

“당신이 누구인데요?”

 

이상했다.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고 질문 또한 그러했다. 보통 납치범이 납치한 대상의 정체를 물어보기도 하나? 그녀는 답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단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에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입을 벌렸을 땐.

 

“나, 나는.”

 

 

나는…….

그 어떤 소리도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단 한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숨이 가빴다. 나는 누구지? 끊임없이 찾아 헤맸던 물음이 속에서 맴돌다 목구멍에 턱 막힌다. 허억, 허억. 밭은 호흡을 내쉬며 손을 떨자 그가 그런 그녀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다가와서 끌어안기 시작한다.

 

쉬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부드럽다. 숨을 몰아쉬느라 빠듯해진 폐. 그 위를 토닥이는 손길은 분명 처음 느껴보는 종류였지만 그럼에도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아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니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누구에게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가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부인의 칭호를 붙이고 살아갈 백작저로? 하지만 남편이 죽어버렸는데. 아니면 저를 크리스털 광산과 맞바꿔 중년과 팔아치운 양부모에게? 그도 아님 저가 처음 살아있다는 걸 자각했던 일곱 살의 끝 무렵으로 가야 할까.

 

막막함인지 허무함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 들어오고 왈칵 울음이 터진다. 목적지를 잃은 그녀가 매달릴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낙화(落花)하는 수선화. 그리고 살인자의 옷자락이 전부였다. 엉엉거리는 그녀의 울음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의 페르세포네.

 

당신을 정말 많이 기다렸어요.

그러니까, 날 선택해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들.

 

 

 여령.

 

그러나 이제는 그 두 음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잔뜩 웅크린 그녀의 몸이 반응하듯 움찔거린다. 그러면 그는 다시 그녀의 동그란 뒤통수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인다. 괜찮아요. 하고 귓가에 소곤거리는 목소리. 차츰 진정이 되어갈 때가 되어서야 울음소리가 멎는다. 허나 그 와중에도 ‘여령’이란 이름은 여전히 그의 입을 떠나지 못하고. 틈틈이. 계속. 익숙해질 때까지 발음한다. 이 모든 게 그녀를 위한 일련의 과정과도 같다는 듯이.

 

당신은 누구예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어느새 축축이 젖은 얼굴은 반사될 것도 없으면서 괜히 속도 없이 빛나는 것만 같았다. 그에 그는 작지만 커다란 희열이 피어오름을 느꼈다. 그녀를 안은 두 팔 너머로 닿아오는 체온에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이제부터 자신의 세계를 열어갈 것이다. 그녀가 모르게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제야 그걸 궁금해하는군요.”

 

잔잔하게 웃음을 터뜨린 얼굴. 그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이곳이 깜깜한 지옥이라는 것과, 어둡고 깊은 호수. 그리고 사시사철 피어있는 수선화. 그림자조차 지지 않는 그곳에서, 그의 이름이 탄생하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데스? 왕? 그림자?

수많은 단어가 머릿속에 오고 갔지만 뇌리에 박히듯 날아든 이름은 하나뿐이었으니.

 

 

활.

 

.

.

이활(李猾).

그녀가 명명한 그의 이름.

 

 

 

8. 페르세포네

 

그는,

이활은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세계. 지옥 땅에 발을 붙일 그녀에게 마지막 경고라도 주듯, 바라보는 눈빛은 서리기 그지없었다.

 

스틱스 강의 맹세. 지옥. 선택의 기회.

 

그러나 그 말엔 다소 어폐가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이 곧 그녀가 돌아갈 유일한 세계일 수밖에 없으니.

 

 

여전히 붉게 물든 웨딩드레스.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혈을 묻혔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손을 붙잡으며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열 살의 어린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

 

 

 

“석류알을 삼킨 것이 누구의 의지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

.

 

지옥으로 향하는 페르세포네.

그곳엔 찬란한 봄의 꽃도, 지긋지긋한 파티도, 빛났다 부서질 아름다움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그와 그녀만이.

이활과, 여령만이.

 

두 사람만이 서로의 구원이 되어.

©Copyright Does God work overtime? DON'T RE-POST ARTS

BGM : Sereno, Benicx - 마지막 세계의 왈츠 (Orchestra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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