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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이 울리는 날.

루예
유예여령

여령은 식탁에 앉아 가만히 폰을 들여다보았다. 톡토독, 하고 타자를 누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수연과 톡톡을 나누고 있는 그녀는 픽, 하고 웃으며 타자를 두드렸다.

 

이제 막 사회생활에서 나와 쉬고 있는 여령은 거실 식탁에 앉은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 보았다. 피곤한 사회생활이 저물어가는 지금의 시간은 그 어떤 시간보다 편안했다. 어느새 대화의 막바지에 이른 여령은 수연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메세지를 보내고, 그 답장을 받고서 하아- 후련하다는 듯이 여령이 숨을 밷었다. 오늘 묵은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톡톡,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식탁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창문 너머를 응시하는 눈빛엔 달빛이 물들어 있었다. 과하지도, 미세하지도 않은 작은 미소가 창문에, 그리고 주방에 있는 유예의 눈에 비추어졌다.

 

여령은 톡톡에서 나와 기사를 켜 스크롤을 내리던 도중에 어쩐지 주변에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에 핸드폰에서 눈을 땠다. 여느 때와 같은 집안의 풍경. 그러나 평소같이 들려오는 칼질 소리엔 어쩐지 망설임이 가득한 것 같이 들려왔다. 딱딱 맞추어 울려야 하는 그 둔탁한 소리는 미묘하게 음정과 박자가 어긋나있었다.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여령은 그 칼질 소리를 몇 번이나 들어왔었다. 그렇기에 자부할 수도 있었다. 여령은 커다란 유예의 등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유예씨, 무슨 일 있어요?"

 

뜨끔, 답지 않게 듬직한 어깨가 흔들렸다. 저런 모습은 처음인데. 그 행동은 여령의 호기심을 싹 틔웠다. 곧장 식탁에서 일어나 유예의 옆에 바짝 다가간 여령은 유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에??'

 

여령은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당황하고 말았다. 하얗고 창백한 피부에 떠오른 붉은 홍조. 살짝 깨문 입술, 어쩐지 당황한 듯한 검은색 눈동자. 뭐지 이 얼굴은...? 여령은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읽어내지 못했다. 자신이 봐왔던 얼굴들에 담긴 감정들과 지금 이 감정은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령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둔탁한 소리가 그리워졌다. 이 정적을 어떻게 짓밣을 수 있을까. 허나 여령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유예가 정적을 깨트렸다. 말이 아닌, 그의 행동만으로.

 

유예가 그 눈으로 여령을 내려다 보았다. 밖에 떠있는 환한 달 같이 신비롭고 고즈넉한 눈빛. 그 눈빛은 어쩐지 평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큰 혼란을 마주하는 듯이 역설적이게 빛나고 있었다. 유예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큰 몸이 여령을 향한 채로 무릎 꿇어졌다. 당황한 여령은 그를 향해 몸을 숙였지만, 유예는 그런 여령을 막아섰다.

 

"...여령님."

 

그의 낮은 목소리가 여령의 가슴을 간질였다. 곧이어 그의 크고 하얀 손이 주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제 앞에 댔다. 차갑고, 미묘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여령의 손을 감쌌다.

 

어쩐지 가슴 한 쪽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기분에 여령은 고운 입술을 꾹, 하고 다물었다. 혹시 심장소리가 유예에게 들리지는 않을까? 싶은 여령은 가슴을 작은 손으로 꾹 눌렀다. 여령은 잠시 진정 된 분위기에 마음을 가라앉게 하려 애썼으나, 유예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기는 하는지 고개를 들어 갈색 눈에게 눈맞춤을 했다. 여령은 자신을 바라보는 녹색 눈을 쥐죽은 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긴 망설임 속에서, 유예는 입을 열었다.

 

"... 여령님, 이제까지 저는 여령님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유예의 얼굴에 피었던 붉은 꽃이 그의 손과 여령의 손을 통해 옮겨져 여령의 얼굴이 붉게 피어났다. 얼굴과 목, 귀까지. 보이는 곳은 죄다 빨갛고 선명하게 달아오른 채로. 잡힌 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백이 주인님의 반려인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당신을 바라보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사랑이 담겨있고, 그리고 진심이 담겨있는 솔직한 목소리. 유예의 눈은 결코 거짓을 빛내지 않았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오로지 진실과 열정만을 품고 있었다. 차갑다고 느낀 유예의 온기도 어느새 뜨거워져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랑 속에서 피어난 붉은 꽃이 여령의 온기 또한 피워내고 있는지도.

 

"당신의 반려가 되고 싶습니다. ... 여령님."

 

예상했던 대답은 생각보다 부드러웠지만, 심장을 파고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태풍같이 여령을 휘감았다. 그건 자연재해 였기에 거칠었고, 바람이기에 부드럽고 포근했다.

 

여령은 망설였다, 이 축복을 자신이 받아도 될까. 어쩌면 자신에게 과분한 축복이 아닐까. ... 어쩌면 그가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된다면? 온갖 걱정이 쉴 세없이 거세게 몰아쳤다.

 

여령은 눈을 감았다, 살며시 떴다. 화려하지 않은 평범하고 담백한 그의 진실. 그 어떤 것을 내보이더라도, 아무리 화려하고 보기 좋게 포장한다 한들 진심이 담겨있지 않으면 다 소용없고 부질없는 것이다. 눈앞의 이 남자가 그 표본이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짙은 녹빛 눈. 녹색은 모든 색을 틀어 놓는 복잡한 색이지만 유예의 녹빛 눈은 달랐다. 그 눈 속에 다양한 색과의 조화를 담을 수 있고, 그럼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눈. 그래서 그 누구보다 빛나는 진심을 전할 수 있는 눈. 그제서야 여령은 깨달았다. 절대로 후회할 일 따위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이 일을 돌이키며 미소를 지을 거라는 것을. 여령은 입가에 살며시 호선을 그리며 그 축복의 답을 말했다.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어서 저는 기뻐요."

 

유예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맴돌았다.

 

 

 

 

 

 

하늘이 유난히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고 높은 하늘. 5월 중순의 봄바람은 부드럽게 길고 얋은 갈색빛 긴 머리칼을 스쳐 지나갔다. 여령은 떨리는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출근길이 떨리는 이유는, 내향적인 그녀가 과연 이 일을 잘할 수 있을지의 유무였다.

 

끼익, 두꺼운 출입문을 열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온 여령은 프로그래밍으로 입력된 로봇마냥 삐걱거리며 자신의 자리에 툭 하고 앉았다. 하아,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여령은 자신의 가방을 슉, 하고 자신의 무릎 위에 얹혔다. 지퍼를 조금 열자, 각종 물품이 보였다. 쪽지가 붙어져있는 서류, 작은 메모장, 화장품.... 그 중에서 눈에 띈 건 화려하다면 화려한, 담백하다면 담백하게 꾸며진 작은 카드들.

 

"어? 주임님, 그게 뭐예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똘망똘망한 눈으로 가방과 자신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주해나가 보였다. 어쩐지 직장인의 가방에 들어있기에는 묘한 물건에 궁금증이 생긴 걸까. 한숨을 작게 쉰 여령은 곧 작은 카드들 중 한 장을 집어 꺼내 주해나의 손에 건내줬다. 어차피 스타트는 끊어야 했으니까. 오히려 그나마 친분 있는 주해나에게 스타트를 끊는 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주해나는 손에 쥐어진 카드를 훑어보더니, 멍한 눈으로 여령과 카드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에 이르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퍽 우스웠다.

 

"결.... 결혼식이요?!!!"

 

주해나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해.. 해나씨...! 여령이 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어버린 후 였다. 순식간에 사무실 전체의 시선이 여령과 주해나에게로 몰려왔다. 아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여령이 짧게 탄식을 내밷었다.

 

"뭐야, 누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마팀장이 왜인지 재밌다는 얼굴로 둘을 쳐다보았다. 그 목소리에 더 부담되는 시선들. 여령은 하는 수 없이 슬그머니 작게 손을 들어 올렸다. 소심한 몸짓에 사무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주임님 결혼식 올려요??"

 

"와 축하드려요!!"

 

곳곳에서 들려오는 축하의 목소리와 박수 소리. 여령은 그 낯선 모습에 얼굴을 긇적였다. 어찌 됬건 주해나 덕분에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청첩장을 뿌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여령은 가방의 지퍼를 시원하게 열고 청첩장 카드들을 손 한가득히 집어 올리고선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 오늘은 더 피곤해지겠네...'

 

벌써부터 뻐근해지는 듯한 팔을 힐끗 바라보고선 여령은 웃는 얼굴로 몰려오는 회사 동료들을 맞이했다.

 

 

 

 

 

유예는 가만히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카드를 바라보았다. 결혼식이라... 설화계에는 없는 문화. 인간과 인간이 서로 평생의 반려가 되기 위한 과정 중 하나. 유예는 청첩장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뿌려야 하는 걸까? 결혼식엔 저와 여령만으로도 충분한데, 관객이 필요한 걸까.

 

백을 설득하는데는 생각보다 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로는 어차피 곧 깨질텐데 자신이 알 빠 없다면서 귀찮다는 듯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었지. 자신이 그녀의 운명의 상대임을 잘 알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리라. 김소하나 다른 설화계 존재들은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것 같다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유예는 주인.... 아니, 여령만을 보고싶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령을.

 

결혼식은 이번 주 일요일. 그때가 쉬는 날이기도 하고 괜히 평일에 열기에는 둘 다 시간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 주말에 하기로 결정했다. 토요일은 드레스를 정하기로 해서 넉넉하게 일요일로 잡았다.

 

"..선배님?"

 

문득 성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 유예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거지.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괜히 신경 쓰인 유예는 늘 여령에 대해서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자신을 생각했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유예는 작게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 아무것도 아냐."

 

"네... 그건 그렇고 그건 뭡니까?"

 

이곳에 묵직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밝게 꾸며진 카드가 눈에 띄었는지 성열은 유예가 든 카드를 바라보았다. 유예가 손을 급하게 내렸지만 이미 늦은 터. 눈을 두어번 그

끔벅이고 눈을 비빈 성열이 어느새 유예를 벙찌게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님 방금 그거......"

 

"..."

 

"청첩장 아닙니까?!!"

 

실수했다. 하필이면 들켜도 성열이라니. 작전 2팀에 성열의 목소리가 고래고래 퍼졌다.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고, 모든 후배들이 유예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평소에 이렇게 집중하면 좋을 것을,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많은 후배들을 바라보다가, 유예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선배님 진짜 결혼하시는 겁니까???"

 

곧이어 들려오는 지석의 목소리, 귀찮게 됐다. 청첩장을 뿌리기는 싫었는데. 하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유예는 손에 들고있던 카드를 성열에게 건넸다. 곧 이어질 질문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괜히 지끈거려 인상을 찌푸리곤 작은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째깍째깍.

 

여령은 쉼 없이 울리는 아날로그 시계 소리에 괜히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기 급급했다. 어쩐지 어색한 늘어진 하얀 웨딩드레스,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고급 레이스. 후줄근한 후드티나 츄리닝 바지를 입고 살아온 여령에겐 너무나도 어색하고 낯선 자신의 모습.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은 속으론 긴장으로 바짝 조이고 있음에도. 갈색빛 눈엔 행복에 젖어있는 모습이었다.

 

신부 준비실에는 말소리가 오갔다. 커다란 방이어서 그런지 메아리처럼 소리가 퍼져 신비로운 기분이었다. 결혼을 축하한다는 회사 사람들. 그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기분이란, 어쩐지 너무나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여령은 늘 항상 어딘가의 중심이 되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사이에 회사 사람들이 썰물 오듯이 오고 밀물 빠져나가듯이 나갔다. 허전하고 큰 방에 혼자 남겨진 여령에게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령~ 이 언니 몰래 결혼하려고 했어~?"

 

"수연아!"

 

입구 앞에 팔짱을 낀 채로 장난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수연에게 우다다 달려간 여령이 수연의 쪽으로 기울여졌다. 하얀 드레스가 바닥에 질질 끌렸지만 너무나도 반가운 얼굴을 그저 바라만 볼 수 있겠는가.

 

"야야 드레스 다 끌린다!"

 

"흐아아... 보고 싶었어....."

 

자신에게 안긴 여령을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픽, 웃은 수연이 잘 정돈된 머리를 팍팍 쓰다듬었다. 흐트러진 머리가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이 여령이 그녀의 품속에서 머리를 부빗 거리며 때 쓰던 여령이 고개를 들었다.

 

"결혼 축하한다, 여령아."

 

엄마의 미소 같은 포근함이 수연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혈연과 유전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마음 만은 가족으로 이어져있는 하나밖에 없는 가족. 혈연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정작 자신에게 피와 살을 준 아빠는 해외에 나가고 매세지 몇 번만 겨우 주고받는 게 고작이다. 그런 아빠가 결혼식이 있는 이번에도 참가하지 못한단다. 오히려 아빠가 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 여령이다. 이렇게 하나뿐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녀가 더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궁금한 건데, 근데 그 남자분과는 어쩌다 만난 거야? 소개팅 받았어?"

 

문득 궁금증이 피어오른 수연이 여령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여령의 머릿속은 잠깐 일시 정지 되었다가 일순간 정지되었던 사고를 지나치게 빠르게 돌아가며 겨우 한 문장을 떠올려냈다.

 

'어떡하냐...??'

 

길에서 만났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건 또 이상하다. 소개팅...? 해나씨가 소개해줬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여령은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꺼림칙한 열기를 느끼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때마침 익숙한 걸음걸이 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하면서 절도 있는, 그녀가 무척이나 잘 아는 걸음걸이였다.

 

"여령님."

 

여령은 수연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수연의 어깨 너머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얗고 삐쭉삐쭉한 머리카락이 오늘은 잘 정돈되어 백을 연상케 하는 머리가 어째서인지 낯설었다.

 

순간, 허공에서 묘한 스파크가 튀었다. 수연과 유예 사이에서 그 둘만이 알 수 있는 기류. 물론 그걸 알 리 없는 여령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식이 시작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헐.. 벌써 들어가야 하네? 그럼 난 이만 갈게. 이따 봐~"

 

수연이 여령에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곧바로 뒤돌아 식장으로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점차 수연의 모습이 작아지고 저 멀리 코너를 돌아 식장 안으로 모습을 감춘 것을 보고 나서야 여령은 유예에게로 향했다.

 

둘은 곧장 대기실로 향했다

 

 

 

 

둘은 대기실에 같이 있었다. 본래라면 그녀의 아버지가 유예의 자리를 대신하여 서 있었을 테지만, 외국에 있는 아버지는 오늘 못 온다고 한다. 하나뿐인 딸의 결혼식에도 안 오는 그 아버지가 여령은 미웠지만. 덕분에 유예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늘어 기분이 좋아진 여령이었다. 싱글벙글한 얼굴이 피어오른 여령이 유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이상했다. 무뚝뚝한 그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아주 미묘하지만 어딘가 뾰루퉁한 얼굴. 여령은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뭐지? 싶은 여령이 머리를 굴렸다. 무슨 일 때문에 저렇게 뾰루퉁한 표정인 걸까. 차래차래 오늘 있었던 일을 되감은 여령이 입을 열었다.

 

"유예씨..."

 

"..."

 

"혹시, 삐졌어요?"

 

아까 수연이를 빤히 쳐다본 것이 거슬렸던 것일거다. 그것이 이유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과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그 이유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말에 유예는 말없이 하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 저 행동. 여령은 문득 지난날을 떠올렸다. 붉어진 얼굴에 저 멀리 향한 짙은 녹색 시선. 커다랗고 하얀 그의 손이 자잘한 머리를 다시 쓸어 올렸다. 묘하게 하얀 얼굴에 붉은 생기가 돌았다. 큰 손으로 고운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퍽 웃기고 너무 사랑스러워서, 여령이 풋, 하고 작게 웃었다.

 

 

 

"... 왜, 웃으십니까."

 

"그냥.... 사랑스러워서요"

 

그 말에 유예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이윽고 얼굴에 돌던 붉은 생기가 순식간에 그의 얼굴을 완전히 뒤덮었다. 여령은 문득 빛나는 갈색 눈으로 그를 천천히 눈에 담아내고, 깊이 응시했다. 어쩔 줄 몰라 계속 짧은 머리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당황해하는 녹빛 눈이, 붉어진 그의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진 귀가,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였기에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그를 사랑했다

 

때마침, 밖에서 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축복의 길이 둘을 부르고 있었다.

 

"유예씨."

 

".... 네."

 

"그럼 이제, 갈까요?"

 

여령은 작은 손을 유예에게 내밀었다. 활짝 핀 곱고 섬세한 손. 잠시 그 손에 시선이 머무르더니, 그의 하얀 손이 그 손을 맞잡았다. 하얗지만 흉터투성이에 다소 거친 피부. 그녀의 얼굴을 다 가릴 듯한 크기. 아, 여령은 다시 웃었다. 거칠고 흉한 손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여령님과 함께라면, 언제든지."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홀을 향하였다.

 

 

"신랑, 신부 입장!"

 

 

주례를 맏은 사회자가 그리 외치자, 둘을 가리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유예가 여령의 팔 사이에 자신의 팔을 걸고선, 누구보다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여령도 마찬가지로 그런 눈을 보고 싱긋 웃었다.

 

환호성과 함께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이 울렸다. 하얗고 화려한 길이 열리고, 여령은 한 손으론 부캐를 잡은채로, 유예는 그런 여령의 팔을 꽉 붙잡고선 그 길을 나아갔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 축복의 목소리, 간간히 들리는 휴대폰 카메라 소리가 식장을 메웠다.

 

"주임님 행복하세요!!"

 

"팀장님, 신부님 잘 챙기셔야 합니다!!"

 

익숙한 얼굴들이 한 마음으로 둘을 축복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울고, 각자가 각각 다른 방법으로 그 둘의 길을 기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불현 듯 여령은 이게 꿈인가 싶었다. 이게 꿈이여서 너무 달콤한 것 아닐까. 여령은 괜히 볼을 꼬집으려다가, 유예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무표정 같지만 미묘하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얼굴. 여령은 그 순간, 그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이렇게 그와 가까워져 행복의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그 날도 꿈 같이 느껴졌지만 실제 현실이었다. 아, 이건 꿈 같은 현실이었다. 너무 달콤해서 현실인 것도 게하는 현실.

 

 

문득 유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휜 눈꼬리, 미묘하게 호선을 그린 입, 여령을 담고있는 녹색 눈. 기뻐하고 있는 그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여령은 그에 답하듯이 활짝, 햇살보다도 환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둘은 동시에 흘러가는 시간이 느려진 것 처럼 느껴졌다. 오직, 그 속엔 그 둘만 있는 것 처럼.

 

아득히 환한 축복 속에서, 그 둘만의 길이 열리고 있었다.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축복의 길이, 그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축복이 울리는 날, 그 무엇보다도 환한 빛이 둘을 감싸 안았다.

 

 

이 행복이 영원하기를.

 

아니, 영원할 것이다.

 

 

축복 속에서 태어난 날들이 둘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end.

©Copyright Does God work overtime? DON'T RE-POST ARTS

BGM : Sereno, Benicx - 마지막 세계의 왈츠 (Orchestra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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