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제목-없음-1 (2).png

Happily [ ] After

디아
은한여령

*Game Over #2. 망각 엔딩 뒤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소꿉놀이를 하며 익숙하게 흥얼거렸던 웨딩 마치. 그 환희에 가득 찬 음악 한가운데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누군가의 손이 보인다. 보라색 장미가 가득 담긴 부케를 오른손으로만 잡고 왼손을 내밀자 그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마주 잡는다. 언제나처럼 서늘한 그의 손이 내 손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시원해. 그가 엄지로 손등을 비비며, 내게 얼굴을 가까이한다. 꽃보다 더 향기롭고 익숙한 향기가 내 곁에 머무른다. 두 손을 맞잡자 초우 성당의 제대가 점점 가까워진다.

‘어릴 때 저런 스테인드글라스 앞에서 결혼하는 게 꿈이었는데.’

내가 속삭이자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더 간질였다.

‘그래서 여기서 결혼하잖아요. 기분은 어때요?’

‘최고야. 앞으로 이 정도의 행복은 다시 못 느낄 것 같아.’

‘[  ]가 행복하면 저도 좋아요.’

[  ]의 귀여운 말에 활짝 웃었다가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있던 제대는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새까맣다. 내가 입고 있던 웨딩드레스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왜?

 

<내가 누나를 해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야.>

 

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 그 남자의 손이 여령의 볼을 조심히 감싼다. 그 손을 내가 조심히 감싸자 남자가 웃는다. 아니, 웃는 게 맞나? 표정이 흐릿해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름도 잊었고 얼굴도 잊었다. 언제나 사랑했던 눈동자 색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했다. 널 아주 많이 좋아해. 널 많이 사랑해. 그러니 이런 결정을 내리는 나를 미워해. 그러나 내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내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촉촉한 그 감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 * *

 

“어라……? 나 왜 여기서 자고 있지?”

내가 눈을 뜬 건 집 앞 공원 벤치 위였다. 내 카디건이 몸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마치 누가 꼼꼼히 챙겨서 덮어준 것처럼. 몸을 일으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사람 그림자는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디건을 집어 들자 서늘한 향이 난다.

이 향이 이상하게 그립다. 사랑스럽고, 포근하다.

이상하지. 서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포근하다고 하다니. 어쨌든 야근을 하다가 공원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잘 안다. 술에 아무리 취했어도 집에는 잘 들어갔는데. 게다가 항상 데리러 오기도 했고…….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밤 열 한시다. 얼른 집에 들어가야지. 이때쯤이면 [  ]가 현관에서 입술을 삐죽이며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러니 빨리 들어가야 해.

……어라?

누가, 기다리는데?

마치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내 기억이 뿌옇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렇지만 분명……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뚝 자리에 멈춰섰다. 꿈이라도 꿨나? 이상한 기분에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근데 왜 자꾸 누가 보는 것 같지. 그전에 왜 나 여기에 서 있지? 설마 벌써 건망증이 왔나. 아직 20대 후반인데.

머리를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와중에 배가 고파 먹을 거 생각뿐이다. 집에 가서 뭘 해 먹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으음. 냉장고에 두부랑 달걀은 있을 테니 두부전이나 간단하게 해 먹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 앞에 오니 웬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와, 엄청 크다. 키는 못해도 190은 되려나? 머리는 왜 저런대. 탈색 엄청 했네. 두피가 남아나지 않겠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집에 들어가기 위해 점차 거리가 좁혀지자 그 남자의 몸 구석구석에 남은 흉터가 자세히 보였다. ……조폭인가? 무서운 마음에 시선을 피하며 남자를 스쳐지나 현관으로 향하자, 그가 한숨을 쉬며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날 보는 시선도 함께 느껴진다. 왜 쳐다보는데? 도어락을 몸으로 가리며 비밀번호를 누르고 얼른 집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오늘 뭐야?”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 남자를 안다는 듯이. 마치 현재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듯이.

 

“여수연! 너 대체 왜 전화를 안 받아!”

새로운 프로젝트 때문에 야근을 해버렸다. 다시 출근하는 첫날부터 야근한 게 화가 나 오랜만에 강가에 가서 맥주 한잔하려고 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친구는 계속 부재중이다. 톡도 보지 않고 대체 뭘 하는지. 한숨을 푹 쉬며 세 번이나 전화했지만, 여전히 받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줬을 텐데. 음성 메시지를 남겼지만 어째 오늘은 연락이 오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들곤 집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혼자 마시는 수밖에. 내가 움직일 때마다 가로등이 불안하게 깜박거리는 게 어제의 그 하얀 머리 남자를 생각나게 했다. 그 남자 진짜 뭐였지? 샤워하고 난 다음에 창문으로 내다보니 여전히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어서, 커튼을 아예 집게로 집어 엿볼 틈새조차 없게 만들고 침대에 누웠었다. 덕분에 잠들기까지 한참 걸려서 아침에 지각한 건 덤이다.

“에휴.”

오늘은 없겠지. 집 앞 골목에 몸을 숨기고 집을 바라보니 집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역시 어젠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그 밤에? 주택가에서?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납득하고 발을 뗄 찰나였다.

“안녕, 누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자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 소년인가?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는 외모를 가진 남자는 쓰고 있던 검은 마스크를 검지로 내려 턱에 걸쳤다.

“여기서 뭐 해요?”

“집에 가는 중인데, 그보다. 누구세요? 저 아세요?”

“……아. 정말 완전히 잊었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남자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자, 멀어지지 못하도록 내 허리를 당겼다. 그리고 말랑한 게 내 입에 닿는다. …말랑한 거? 소스라치게 놀라며 남자의 가슴을 밀어도 그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득하게 손으로 허리를 감싸왔다.

다물린 입술을 달래듯 혀로 훑다가 저절로 벌어진 잇새에 파고드는 모양이 마치 내가 키스할 때 어떻게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의 가죽 재킷을 꽉 쥐자 남자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한참 뒤 입술을 떼자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온전히 내 눈에 담겼다. 난 이 눈동자를 알고 있다. 이렇게 웃는 사람을 알고 있다.

“……저 알죠?”

“아주 잘 알아요.”

“근데, 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기억이 안 나요.”

“알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좋진 않지만.”

“네?”

동문서답을 하듯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의 손이 내 볼을 감쌌다. 이상하다. 거부하고 싶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서늘한 손이 소름 끼칠 정도로 익숙하고 사랑스럽다.

“누나, 내 이름…… 서은한.”

“은한……씨.”

“그건 왜 붙여요. 떼요.”

남자가 짜증스러운 듯 인상을 팍 찡그리곤 볼을 세게 쥔다. 내가 다시 말할 때까지 볼을 놓지 않을 기세다. “은한.”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도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원하는 답이 있는 건가? 그의 입술이 삐죽이던 순간, 무심코 머릿속에 떠올랐다.

“은한아.”

“응, 누나.”

그제야 은한이 활짝 웃었다. 남동생도 없고 이렇게 이름을 편하게 부르던 남자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입에 착 달라붙는다. 왜 이렇게 친근하단 말인가. 그리고 평소의 그는 이렇게 웃지 않았다. 좀 더 눈은 움직이지 않고, 입을 다물고 조용히 미소짓는 타입이었을 텐데.

근데 내가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 거지?

“집에 들어가는 중이었어요? 나도 그런데. 이건 뭐예요?”

“맥주랑 아이스크림.”

“이상한 조합이네.”

내 생각을 끊듯이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가로채며 은한이 말을 걸었다. 이상한 조합이라니. 맥주를 마신 다음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얼마나 상쾌한데. 괜히 든 생각에 입을 삐죽거리자 은한이 내 튀어나온 입술에 가볍게 뽀뽀하며 손을 잡아 왔다.

“하긴, 누나는 꼭 술 마신 다음에 아이스크림을 먹었죠.”

“어떻게 알았어…요?”

“반말해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로 자연스레 내 집으로 향한다. 내게 찰싹 붙어 걷는 모양새가 또 익숙했다. 어제부터 이상하다. 마치 내가 기억이라도 잃은 것처럼 모든 것이 변한 것 같다.

계단을 올라 도어락에 손을 뻗으려고 하자 은한이 먼저 손을 뻗어 우리 집 비밀번호를 누른다. 06211222. “누나. 나 이제 이거 잘 다루죠?” 도어락을 톡톡 치며 은한이 미소지었다. 그러면서 현관문을 열어 내가 먼저 들어갈 수 있게 등을 살짝 민다. 내가 얼떨결에 들어가자 자연스레 들어와 문을 닫는다.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어?”

“누나랑 같이 정한 거예요. 누나가 일방적으로 하자고 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려나.”

“너랑 내가?”

“응. ……내가 어딜 다녀온 사이 누나가 사고로 기억을 통째로 잃었다고 수연 누나가 말해줬어요. 그렇다고 나까지 기억 못 하다니 정말 서운하네요.”

은한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웃음기 없이 날 내려다보았다. 뭔가 어색했다. 하기 싫은 말, 정확히는 준비된 변명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사고가 났었다고?”

“응.”

그가 미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내가 되려 할 말이 없어졌다. 많이 걱정한 걸까?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은한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숱이 얼마나 많은지 내 손이 가려지는 게 신기하다. 그는 기분이 좋은 건지 피식 웃으며 허리를 조금 숙여준다.

근데 잠깐. 여수연 얘는 내 전화는 안 받고 얘한텐 전화했다, 이거야? 어이없는 마음에 머리에서 손을 떼고 휴대폰을 꺼내 들자 순식간에 은한이 내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는 가죽 재킷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안 돼요. 수연 누나 지금 잘 시간이잖아요. 유학 가서.”

“어? 수연이가 유학 갔다고? 언제?”

“……누나 사고 난 뒤에.”

미묘한 간격을 두고 은한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수연이가 사고당한 나를 두고 유학 갔다고? 말도 안 돼. 이상하게 수연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느껴지는 불안 한가운데서 수연이를 이제 다신 못 본다는 문장이 고개를 든다.

내가 미쳤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은한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섰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얼른 들어오라는 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또 기시감이 든다. 나는 이렇게 내미는 손을 잡아본 적이 있다.

신발을 벗으며 그의 손을 잡자 그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손을 당겨 끌어안는다. 품이 서늘한데도 포근하다. 나도 모르게 팔을 올려 마주 안자, 날 옭아매는 그의 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약간의 신음도 들린 것 같았다. 아닌가, 착각인가?

“오늘도 영화 보면서 맥주 마실 거예요? 아이스크림은 넣어둘게요.”

현관에서 부엌이 바로 보이긴 했지만, 비닐봉지 안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는 모양새가 내 집이 익숙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냉동실을 열어 아이스크림을 넣는 모습이 이상하게 어색하다. 저런 짓은 안 했었는데. 또 내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온다.

“우리 누나, 오늘 왜 이리 멍할까.”

금세 다가온 은한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허리를 숙여 입술에 여러 번 뽀뽀하는 이 행동이 매우 익숙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피하자 또 웃는 소리가 난다.

“왜 시선을 피해요?”

“아, 아니 그냥…….”

“나 무서워?”

“그런 건 절대 아냐!”

네가 왜 무서워. 내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린다. 내가 잃어버렸다던 기억인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답이 나와버렸다. 그래도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은한의 미소가 짙어졌다. 내가 이런 대답을 할 걸 예상한 것처럼.

“그럼 나 보고 싶었어요?”

“응.”

또다. 이번에도 뇌를 거치지 않고 대답이 나온다. 나도 모르게 내 입을 손으로 막았다. 뭐야. 진짜 느낌 이상해. 내가 대답한 거야?

“그래도……. 몸은 다 기억하고 있나 봐.”

다시금 내 눈가에 뽀뽀하며 은한이 중얼거렸다. 그는 매우 기뻐 보였다. 이런 대답을 들을 줄 몰랐다는 것처럼. 그도 그렇겠지. 나도 얘가 이렇게 익숙한데 얘는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안 순간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은한의 볼을 쓸자, 은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곤 볼을 감싼 내 손을 제 손으로 다시 감쌌다. 눈을 감고 내 손만을 느끼는 것처럼 내 손을 천천히 비빈다.

“얼른 맥주 마셔야죠. 마시고 싶잖아.”

“으, 응.”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라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그가 맥주 두 캔을 들고 와 자연스레 날 침실로 인도했다. 같이 살기라도 했나? 진짜 왜 이리 익숙한 거지? 이제야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자 은한은 이미 침대에 걸터앉아 테이블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은한아. 외투 벗고 침대에 앉아야지.”

“아.”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다는 듯 은한이 어색하게 가죽 재킷을 벗었다. 멀뚱히 날 바라보길래 재킷을 건네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두 사람의 외투가 나란히 걸려있는 모습은 정말 지독하게도 익숙했다. 이런 내 기분에 이제는 어이가 없다……. 외투를 바라보는 내 허리를 은한이 뒤에서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얼른 내 옆에 앉아요.”

내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자 또 얼굴에 열이 올랐다. 고개를 돌려 은한을 쳐다보자 그는 그저 웃으며 내 반응을 좋아할 뿐이다. 그러면서 착실히 뒤로 당겨 나를 제 무릎 위에 앉힌다.

“내가 다녀오면 누나가 보자고 한 영화가 있었는데.”

무릎에 앉힌 상태로 맥주를 따서 내게 내민다. 얼떨결에 맥주를 받아들려고 하자 은한이 갑자기 맥주를 든 손을 멀리 뻗었다. 어? 무심코 몸을 움직여 손을 내밀자 그는 손을 내리지 않는다.

“뭐야. 빨리 줘.”

내 말에 은한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기가 맥주를 마신다. 뭐야, 약 올리는 거야? 얼굴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은한이 맥주를 입에 머금은 상태로 내게 입을 맞춰온다. 입으로 건네주는 맥주가 시원하긴커녕 미지근한데도 달콤한 것 같았다. 맥주를 꿀꺽 삼키자 은한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마시네요.”

“가, 갑자기 이런 걸 예고도 없이…….”

“우리가 이런 걸 예고하는 사이예요?”

이건 또 무슨 얘기야. 영화를 트는 것도 잊고 다시 은한이 입으로 넘겨주는 맥주를 받아마셨다. 맥주를 줄 뿐만 아니라 은근히 혀로 치열을 훑고 지나간다. 얘 왜 이렇게 키스를 잘 하는 거야.

“우리가 사귀는 건 알겠어. 근데 이런 건-”

“우리가 그냥 사귀는 사이예요?”

“아냐?”

“……거기부터 해야 하나?”

근데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대체 무슨 사이길래 이렇게 내 집에 거리낌 없이 들어오고, 비밀번호는 어떻게 아는 거야? 심지어 우리 집을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드나드는 것 같은데. 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은한은 잠깐 하…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맥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내 눈만을 바라보며 그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내 왼손을 나란히 겹친다. 이게 무슨…… 어라. 반지 디자인이 같다. 심지어 반지 가운데엔 투명한 보석이 있다. 다이아몬드인가? 그럼 약혼반지 같은데……. 손을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올리니 이제 은한의 입은 미소짓고 있지 않았다.

“흐음……. 누나랑 나, 이번 보름에 결혼해요.”

“…………뭐?”

“결혼해요. 단둘이서만.”

“내가? 너랑?”

“이 반지도 같이 사러 간 건데.”

이상하다. 거짓말 같은데 증거는 확실하다. 서로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번갈아 봐도 명백하게 같은 디자인이었다. 은한이 다시 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왼손 약지에 있던 반지를 빼서 안쪽을 보여준다. 여령. 선명히 새겨진 내 이름이 또렷하게 보였다.

“됐죠?”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제 손에 다시 반지를 끼운 은한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진짜? 결혼식 전인데 내가 약혼자에 대한 기억을 잃은 거야? 아침 드라마야? 믿을 수 없어 약지에 있던 반지를 빼서 안쪽을 확인했다. 선명하게 각인된 ‘서은한’이라는 글자가 나를 마주한다. ……큰일 났다.

“각오했는데……. 기분이 좋진 않네.”

날 껴안은 채로 몸을 눕힌 은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영화고 맥주고 뭐고 나도 멍했다. 지금 내가 약혼자를 잊었다 이거야? 그래서 익숙하다고 느끼고, 그의 스킨십을 거부하지 않은 거고? 미안한 마음에 눈치를 보며 그의 품에서 꼼지락대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허리를 간질였다.

“누나.”

“응?”

“이제 그만 자요. 맥주는 마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

“아, 응…….”

가라앉은 은한의 목소리에 눈치를 보며 그에게 더욱 안겼다. 근데 결혼식이면 보통 하객을 불러야 하지 않나? 둘만의 결혼식이라니. 회사 사람들도 초대해야 하는데. ……하긴 수연이가 오지 못하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은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내 잠옷을 건넸다. 그러면서 자기도 옷을 벗고 그 옆에 걸려있던 실내복을 입는다. 그렇구나. 내 집에서 같이 지냈구나. 어제는 잠시 어디 다녀온 거고. 어떡하지, 민망해 죽을 것 같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고 나도 천천히 옷을 벗었다. 어느새 다 갈아입었는지 은한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부끄럽지. 잠옷으로 갈아입자 그가 천천히 다시 나를 눕히고 나란히 눕는다.

“내가 그렇게 반의반만이라도 날 생각해달라고 했었는데……. 아예 전부 잊어버리면 어떡해요, 누나.”

작은 원망의 말이 갑자기 내 가슴을 후벼팠다. 은한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아무리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도 기억을 잃은 연인을 보는 건 힘들 텐데.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아까처럼 머리를 쓰다듬었다.

“빨리 기억해낼,”

“아니. 기억하지 마요.”

내 말을 잘라먹고 은한이 무섭게 쳐다본다.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잡아먹을 듯 쳐다본다. 왜지? 기억해야 좋은 거 아닌가? 은한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은한도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그렇게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언제 그렇게 나를 봤냐는 듯 다시 상냥한 눈동자로 돌아와 내 등을 토닥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은한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재우려는 듯 천천히 토닥이는 손길이 포근하다.

추측이지만, 은한은 언제나 나를 이렇게 재워준 거 아닐까? 괜한 고양감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그의 손길을 느끼다 보니 점점 졸리다. 그래도 맥주 마시고 싶었는데…….

 

여령만을 이불로 꼼꼼히 감싸며 은한이 이마에 키스한다. 고마워하고 싶진 않았지만, 활이 만든 변명을 여령이 믿어주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저승아씨의 일도, 기억을 메우는 일도 실패했을 것이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미룰게. 누나.”

은한은 몸을 웅크려 더욱 여령을 품에 가두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잠든 여령은 답답하지도 않은지 은한의 품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옆으로 누운 탓에 흘러나오는 침을 은한이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내가 [ ]이 되면 누나를…….”

오늘따라 휘황찬란한 달빛이 창문 틈으로 은한만을 비추었다. 여령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은한의 품에서만 울린다. 이 순간만큼은 그 품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보여주듯이.

은한이 달빛을 받은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여령 얼굴 곳곳에 키스하다가, 여령의 손을 들어 손바닥에 입술을 묻는다. 여령이 이렇게 소중해질 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은한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억눌렀다.

지금 안고 있으니까 괜찮아. 라고 되뇌며.

 

* * *

 

“내가 이런 웨딩드레스를 골랐다고? 이거, 너무…… 파였는데.”

가슴이 깊게 파인 것도 모자라 등까지 깊게 파였다. 진짜 내가 고른 게 맞아? 내가 좋아하는 드레스는 확실히 아니다. 난 수연이가 그만 말하라고 할 정도로 머메이드 라인을 입겠다고 노래 부르고 다녔으니까. 근데 이렇게 파이고 풍성한 드레스라니. 정말 예상도 못 했다. 과거의 나는 대체 뭘 고른 거야.

수연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찍고 톡으로 전송했다. 그럼 뭐해. 수연이의 톡에선 여전히 1이 사라지지 않는다. 유학 갔다더니 날 잊은 건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입을 삐죽여봤자 전화는 물론,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난 신경질적으로 화장대에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몸을 돌려 봐도 정말 한 군데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은한을 마주 보자 그는 소파에 기댄 채로 그저 웃는다. 저 표정을 보니까 알겠다. 이건 서은한이 고른 거다.

“네가 골랐지?”

“어. 그 부분만 기억난 거예요? 아쉽게.”

드레스로 갈아입을 때부터 계속 미소짓던 은한이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세팅이 완료되었다는 말에 은한이 날 보며 양팔을 벌렸다. 내가 다가가자 내 허리에 얼굴을 폭 묻는다. 좋아하는 건가? 그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 머리는 따로 세팅하지 않아도 귀엽네. 잘생기기도 했고.

“이제 나랑 결혼하잖아요. 기분은 어때요?”

“너와의 기억이 다 돌아오면, 나 행복해서 죽을지도 모를 정도로 행복해.”

“……우리 누나가 행복하면 저도 좋아요.”

어째 은한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 같았다. 좋아하는 거 맞나? 내 의문을 알아챈 건지 은한이 내 허리에서 얼굴을 떼고 날 올려다본다. 나와 은한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주었다.

그러자 내 허리에 손을 그대로 둔 채로 일어나더니 입을 맞춰온다. 화장이 지워지든 말든 괘념치 않으며 내 입술을 통해 혀를 넣는다. 하긴 사진 찍을 것도 아니고 뭐 어때. 한참이나 혀를 섞고 입을 떼자 은한의 입술에 붉은색 립스틱이 그대로 묻어있다. ……큰일이다. 얘는 이런 것도 어울리네.

“왜 그렇게 봐요? 아. 새삼스럽게 나한테 반했어요?”

그 말에 얼굴에 열이 화륵 올라왔다. 입을 가리며 시선을 피하자 은한이 쿡쿡 웃으면서 허리를 숙이고 나와 눈을 맞춘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응.”

연애는 기억 하나도 안 나지만, 결혼도 하는 마당에.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잠깐 은한의 표정이 굳은 것 같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바로 미소지으며 내 오금 쪽에 손을 넣고 날 들어 올렸다.

“으앗!”

“빨리 나가요.”

“이렇게 나가?”

“싫어요?”

“아니, 아니! 좋아서.”

투피스 정장을 입은 은한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렇게 안겨있으니 새삼스레 은한의 속눈썹이 길게 보인다. 얜 정말 다 예쁘다. ……이거 콩깍지인가? 눈을 굴리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은한의 손이 나를 더욱 꽉 잡는 것 같았다.

디아_은한여령(삽화)

삽화 by.앵구

은한에게 안겨 밖으로 나오자 보름달이 환하게 숲을 비추고 있었다. 정말 환하네. 마치 여기가 가장 달빛이 강하게 비추는 곳이라는 걸 원래부터 알았던 것처럼 은한은 천천히 날 내려놓고 부케를 잡은 내 두 손 위에 손을 겹쳤다.

“신부는 평생 신랑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달빛이 가장 강한 곳 한가운데서, 은한이 나른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날 마주하는 눈동자는 미안한 감정이 한가득하다. 하객이 없어서 그런가? 나는 괜찮은데. 수연이가 없는 건 조금 아쉬웠다. 요즘 연락이 되지 않으니 초대는커녕 축하 인사조차 받을 수 없다는 게 씁쓸했다.

“네.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

“신랑은 평생 신부를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내 대답에 은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뜬다. 그의 눈동자는 언제 흔들렸냐는 듯 진중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네.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은한이 말을 마치자마자 아까보단 부드럽게 내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 천천히 입술만 문대다가 입을 뗀다. 긴장한 모양인지 은한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내 손만은 꼭 잡고 있어 안심된다.

“이로써 우리는 정말 부부가 됐어.”

웃으며 말을 건네자 은한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 표정에 긴장감을 느낀 내가 손을 올려 은한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은한아, 긴장했어? 표정이 왜 그래.”

“……응. 누나가 엄청 예뻐서 긴장했나 봐요.”

“그렇게 예뻐?”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묻자 은한이 고개를 살짝 주억거린다.

“응. 영원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 말에 오히려 내 얼굴에 열이 오른다. 이렇게 직접 표현하는 애가 아니어서 그런가. 쑥스러움에 부케로 시선을 떨구니 내 허리를 끌어당겨 제 품에 가둔다. 나도 입을 다물고, 은한이도 조용히 날 안은 채로 한참 가만히 있었다.

“지, 진짜 예상대로 흘러가는 건 하나도 없네.” 침묵이 어색해 황급히 말을 꺼냈다. 은한이가 움찔거리더니 품에서 날 떼고 바라보았다.

“갑자기 뭐가요?”

“난 내가 결혼을 한다면 스테인드글라스 앞에서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건 이미 해봤으니까.”

“응? 못 들었어.”

은한이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정확히 듣지 못해 되묻자 은한이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는다. 아까부터 긴장한 건가. 평소 때와 다르다.

기억 없이 같이 지낸 일주일 동안 어느 정도 은한을 파악했다. 왜 내가 좋아하는지도, 결혼하는지도 알겠고. 은한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보기보다 날 더 좋아하는 눈이 좋았다. 또 다정하게 나만 바라보는 눈이 좋다. 그 눈동자 안에 담긴 감정이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뿐만은 아니었지만, 사람이란 원래 다 복잡하니까.

“이번 드레스도 예쁘네요.”

“응? 좀 더 크게 말해줘. 아까부터 진짜 무슨 개미가 걸어 다니는 소리처럼 말하고.”

“풋. 그 비유는 또 뭐예요.”

이제야 은한이 웃으며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내 허리를 받치고 강하게 입을 맞춰온다. 나도 영원히 이 시간 안에 갇히기만을 바랐다.

©Copyright Does God work overtime? DON'T RE-POST ARTS

BGM : Sereno, Benicx - 마지막 세계의 왈츠 (Orchestra Version)

bottom of page